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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Apr 14. 2021

나비와 솔로몬

나와 세상 사이, 불협화음에 대하여...

친구 L에게는 타자의 존재를 또렷이 인식하게 만들었던 두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유치원 때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유치원에서 L은 '나비야' 노래에 맞춰 율동을 배우고 있었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양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총총 뛰어다니는 율동이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봄바람에 꽃잎도 방긋방긋 웃으며 참새도 짹짹짹 노래하며 춤춘다."


 L은 다른 아이들처럼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나비춤을 추었을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비야'를 BGM처럼 흥얼거리며 여섯 살의 L이 나비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무엇을 하든 골똘히 생각하고 집중하는 L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아마도 여섯 살의 L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비의 날갯짓을 온몸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유치원 선생님이 다가와 던진 말은 뜻밖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L의 이마를 짚으며) L아, 어디 아프니?"


그 날, L의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당연히 아픈 데는 하나도 없었다. L이 표현한 나비는 분명 봄날의 꽃밭에서 신나게 날갯짓을 하는 나비였는데, 선생님이 그에게서 본 것은 시들어가는 꽃밭에서 힘없이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L은 봄바람에 꽃잎이 방긋방긋 웃고 있다는 가사 표현에 충실하고자 최대한 '방긋방긋' 웃음 지었는데, 선생님이 본 것은 어딘가 아파 보이는 표정이었다. 


밝고 신나게 표현한 춤이 다른 이에게는 낯설고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 이런 비극이 있을까. 그날의 사건은 L이 태어나서 최초로, 자기 자신과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로서 타자를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어디가 아프냐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서야 L은 어쩐지 조금씩, 진짜로, 아파오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난 두 번째 사건은 '자연' 과목의 시험날이었다. L의 인생에 마주한 첫 시험이었고, 문제는 이러했다. 

※ 다음 중 살아있는 것을 고르시오.
   1) 시냇물  2) 구름  3) 돌  4) 토끼

당신은 몇 번을 답으로 고르겠는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L은 사지선다형 문제에서 정답을 4개 골랐다. 4개의 번호에 모두 동그라미를 쳤던 것이다. L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이야. 시냇물도, 구름도, 돌도 정말 살아있다고 생각했어."   


여덟 살의 L은 초등학교 1학년생이 되기에 지나치게 순진했던 걸까. 당시 20대 후반 정도였던 담임 선생님은 그런 L에게 "바보"라고 말하며 반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다. 그날 이후 L은, 1학년 말 아버지의 전근으로 전학을 가게 될 때까지,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며 왕따가 되었다고 한다. L에게는 타자들의 세계가 내가 느끼는 세계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뼈 아프게 받아들여야 했던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이 두 가지 사건은 L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L은 자신과 타자, 자신과 세상의 또렷한 차이를 이른 나이에 인식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살아오는 동안 그 차이로 인해 외롭게 고립되고 힘들 때도 많았지만 덕분에 자신의 세계를 소중히 지키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나의 기억도 하나 떠오른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크리스마스 때 공연할 연극 연습이 한창이던 날이었다. '솔로몬의 지혜'를 극화한 연극이었다. 한 장 한 장 사진 컷처럼 기억나는 장면은 솔로몬 왕이 있었고, 공주가 있었고, 아기를 대체한 인형이 있었고, 그 아기(인형)를 자신의 아기라고 우기는 엄마들이 있었다. 그리고 맨 뒷줄에 시녀들이 있었다. 그 시녀들 중의 하나가 바로 나였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 뒷줄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내가 생각했던 것은 '왜 나는 시녀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솔로몬 왕이나 공주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라는 존재가 유치원 선생님이라는 타자에 의해 시녀라는 배역으로 규정되어버린 상황이 억울했다. 왕이 있으면 백성도 있고, 공주가 있으면 시녀도 있는 게 인간사의 일이겠지만 전체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어렸으니까. 타자의 시선에 의해 시녀로 규정된 내가 마치 진짜 시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아진 내가 초라했고 약간은 슬펐다.   


L이 세상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쪽이었다면, 나는 세상의 시선을 떨쳐내지 못한 채 세상의 잣대로 나를 재단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세상의 무리에 속하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세상도 저만치 더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L도 자기만의 무게로 외롭고 힘들었겠지만 나 역시 그랬다. 나와 타자, 나와 세상은 오랜 시간 불협화음이었다. 


나는 아직 타자와의 관계 맺기, 세상과의 관계 맺기에 성숙하지 못하다. 나와는 다른 타자의 시선이 내게 상처가 될 때는 여전히 움츠려들 때가 많다. 하지만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 나 또한 누군가를 나만의 잣대와 시선으로 판단하고 평가했음을...  


세상은 그냥 그렇고 그런 곳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있고, 타자가 있는 곳. 내 맘 같은 타자가 있는가 하면 내 맘 같지 않은 타자도 있는 곳.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는 게 함정이지만... 성숙해진다는 건, 어쩌면 내 맘 같지 않은 타자와도 잘 지낼 수 있는 묘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성숙해지려면 아직 멀었다.  


분명한 건, 시냇물과 구름과 돌을 토끼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L이 좋다. 시냇물처럼, 구름처럼, 돌처럼... 그렇게 다 같이 함께 살아있어서 참 좋다. 설사 남들 눈에 아파 보이는 춤일지라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춤출 수 있다면 어찌 좋지 아니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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