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함이 녹는 시간

by 조혜영

유난히 마음이 뾰족해지는 날이 있다. 추운 겨울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봄이 오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 한겨울인 그런 날. 육체의 피곤함과 함께 찾아온 외부 자극이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린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목을 칼칼하게 만드는 뿌연 미세먼지, 퇴근시간 2호선 신도림역에서의 환승, 오랜만에 신은 굽 높은 구두로 인한 새끼발가락의 통증, 소화가 안돼 더부룩함에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꼬르륵거리는 위장, 밥을 먹다 입속 같은 자리를 두 번이나 깨물고 난 후 느껴지는 아릿한 피 맛, 엊그제 청소를 했음에도 금세 더러워진 현관과 화장실, 버려야 할 오늘치의 음식물 쓰레기... 사실 이런 자극들은 대단할 것도 없는 일상에 가깝다. 그저 그 순간에 느끼는 불편함일 뿐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는 일들이다. 그런데도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이미 소진해버리고 난 날에는 인내심마저 바닥이 나고 마음은 바늘구멍만큼 좁아진다.


엊그제가 그런 날이었다. 함께 일하는 피디는 몇 번이나 전화를 해서 일의 진행 상황에 대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본인도 정리되지 않은 사안에, 답도 찾지 못한 문제였다. 내가 답을 주기를 바라나 싶어 몇 가지 대안을 이야기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명확한 답을 원하는 건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내가 제시한 대안이 마음이 들지 않았거나. 대체 이 통화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 피디로서 느끼는 불안한 마음을 함께 일하는 작가가 알아주길 바랐던 걸까. 본인도 힘들어서 그저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줄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 걸까. 일하는 관계에서 답도 없는 비효율적인 대화를 오래 이어갈 만큼 나는 마음이 넓지 않다. 그렇다고 대놓고 이런 마음을 표현할 배짱도 없는 나는 지지부진한 대화를 힘들게 이어가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적당히 끊을 걸 그랬나,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피디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먹고 사느라 피디도 힘들 테고, 나도 그랬다.


휴대폰에 낯선 번호가 뜬 것은 피디와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낯선 번호로 온 전화는 잘 받지 않는 편인데, 일반 번호가 아닌 휴대폰 번호가 찍혀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고 말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고객님. 일전에 인터넷 가입을 도와드렸던 000인데요."


인터넷 가입을 권유하는 전화였다. 3년 전에 가입한 인터넷이 만기가 되어간다며 새로운 상품을 안내해주는 남자분의 목소리가 과도하게 친절했다. 이 역시도 얼른 끊고 싶었지만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어떤 간절함이 나를 붙잡았다. 그 간절함을 끊어내지 못하고 한참을 들었다. 분명 한국어였음에도 이해가 될 듯 말듯한 내용들이 귓가에 부딪혀 튕겨져 나갔다. 대충 이해한 바로는 당사의 인터넷을 가입하면 무슨무슨 혜택과 상품권 지급, 현금으로 몇십만 원을 보내준다고 했다. 현금을 준다는 말에 솔깃했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전화 달라는 형식적인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곧바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고객님, 월요일이라서 많이 지치실 텐데 우리 힘내서 월요일 부셔버려요! 퇴근 후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문자적 해석으로만 보면 분명 나를 응원하는 메시지임에 틀림없는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지친 건 맞지만 왜 힘까지 내서 월요일을 부셔버려야 하지? 나의 월요일이 아무리 힘들었을지언정 부셔버리고 싶은 마음까진 없는데... 설사 월요일을 부셔버릴 만큼의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부셔버리는 대신 재건하는 데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언제 봤다고 '우리'? 퇴근 후에 행복한 일만 가득할지 어떨지 당신이 어떻게 알고? 안다. 그가 보낸 '부셔버리자'는 말은 힘든 월요일, 씩씩하게 잘 시작해보자는 의미인 것을... '우리'라는 표현 또한 너와 나를 연결시키는 연대의 표현임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허울 좋은 가짜로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진짜로 다시 전화를 했다. 열정과 친절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그의 데시벨 높은 밝은 목소리 너머 먹고사는 자의 고달픔이 느껴졌지만 그의 처지를 일일이 살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단호히 전화를 끊고 수신차단을 했다. 누군가의 번호를 수신 차단한 것은 처음이었다. 씁쓸했다.


그날 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는데 다행히 소독약 냄새는 나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온수에서 소독약 냄새가 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내가 사는 아파트 온수통에서 페놀이 검출됐다는 뉴스를 TV에서 보았던 터였다. 다행히 조치를 취한 후 재검사한 결과 페놀이 불검출 되었다는 공지를 엘리베이터에서 확인했었다. 즉각 온수통을 교체하라는 주민들의 반발과 재건축 아파트이니 이제 와서 온수통을 교체할 수 없다는 업체 측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나는 곧잘 무력해진다. 내년 여름이면 계약이 끝나는 세입자로서 나는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문제다. 시간이 빨리 흘러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서 새집을 알아봐야 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기에. 살아남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짠하고 힘겨운 일이다.


이런저런 신경을 많이 써서 그랬는지 목욕을 하고 나서도 뾰족함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며 뾰족해진 에너지를 분출하다가 음악을 듣기로 했다. 재생목록에 저장되어 있는 음악을 무심히 플레이했다. 그렇게 집안 공기가 멜로디로 채워지면서 조금씩 편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전등을 끄고 최소한의 불빛으로 음악을 들었다. 제휘의 'Dear Moon', 이승윤의 '달이 참 예쁘다고', 짙은의 'Moon'이 연속으로 재생되는 동안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새벽 공기를 맡으려고 창문을 열었을 때는 가는 초승달이 짙은 하늘에 선명하게 떠 있었다.


때로는 한낮의 태양이 눈부셔 얼굴을 찡그릴 때가 있다. 화려한 태양빛이 아닌 서늘한 달빛에 마음이 가닿을 때가 있다. 그 새벽에 나는 '달'에게 위로받았다. 뾰족함이 녹아내리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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