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소설을 써보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한겨레문화센터의 소설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첫 수업 날, 소설가였던 선생님은 소설이 아닌 동화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J. 슈타이너의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동화 속 주인공 곰은 지금 ‘곰’인 채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 곰이 흑마법사의 저주라도 받아 지네나 바퀴벌레, 혹은 그 무엇으로 변해버리기라도 한 걸까. 안타깝게도 동화 속 곰은 인간들처럼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곰이 어떻게 일을 하냐고 묻는다면 이 이야기는 동화니까. 동화 속에선 호랑이도 담배를 피우고 토끼도 말을 하는 법이니까.) 곰이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는 동안 인간들은 산을 깎아 공장을 만들었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에게 다짜고짜 ‘네가 곰임을 증명’하라고 했다. 증명하지 못하면 공장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곰은 자신이 곰임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동물원을 찾아갔다. 곰은 동물원에서 자신이 곰이라는 것을 동족 곰들을 통해 증명받을 수 있었을까? 동물원의 곰들이 말했다.
“이 친구는 진짜 곰이 아닙니다. 진짜 곰은 우리처럼 철창 안에서 살고 있는 법이지요.”
또다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곰이 찾아간 곳은 서커스단이었다.
서커스단의 곰들은 진짜 곰은 춤을 잘 춘다며, 곰에게 춤을 출 수 있는지 물었다. 곰이 말했다.
“아니, 나는 춤을 못 추는데.”
“다들 들었지? 춤도 출 줄 모른다잖아! 진짜 곰이 아니라, 곰 가죽을 뒤집어쓴 털북숭이 게으름뱅이라고.”
소설가 선생님은 이 동화의 줄거리와 함께, 두 가지 자아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회적 자아’와 ‘본질적 자아’.
말 그대로 ‘사회적 자아’는 사회관계 속에서 위치하고 있는 나, 그러니까 가족이나 학교, 직장 내에서 맡고 있는 역할에 따라 주어진 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본질적 자아’는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고유한 ‘나’를 말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선생님은 덧붙였다. 결국 소설은 ‘본질적 자아’로 쓰는 거라고.
한동안 본질적 자아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래서, 내 본질적 자아는 대체 어떤 모습이냐고? 밤사이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이 막 잠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네가 네 자신임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그래야 살려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곰이 곰인 채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동물원 우리에 갇혀서도, 서커스단에서 춤을 잘 추어서도 아니다. 곰은 야생 그대로, 겨울잠을 자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존재하고 있을 때, 증명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 없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의식하지 못한 채로, 동물원 우리에 갇혀 혹은 서커스단에서 쓸 데 없는 재롱을 부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책에서 봤는데(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책이었나), 내면의 기쁨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방법이란다. 내면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 본질적 자아로 가는 이정표이자 내비게이션이라는 말이다.
소설 수업은 그렇게 1년을 이어졌지만, 나는 아직 제대로 된 소설 한 편을 써내지 못했다. 아직 본질적 자아로서 살고 있지 못한 탓일까. (혹시 본질적 자아가 소설은 네 길이 아니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있는 것이라면...)
내면의 기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글을 쓸 때 나는 기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본질적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 잘 들어선 것이겠지. 삶의 순간순간, 기쁨을 많이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나’인 채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