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카페에 가는 사람에게 카페는 확장된 자기 공간이다. 푹 자고 일어난 휴일 아침, 아직은 한가한 카페를 찾는 일은 소소하고 확실한 기쁨이 된다. 카페에서 글을 쓰기도 하지만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그냥 집에서 해도 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집이 아닌 카페가 주는 신선함이 있다. 커피 맛도 집에서 내린 것보다 맛있는 건 기본이고, 평범하고 똑같은 일상의 틈 사이를 지나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자극이 나를 설레게 한다.
산책을 하듯 가볍게 카페를 찾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동네 가까운 카페에 가는 일이 많은데, 성격 탓에 가끔은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고백하자면, 친절한 카페 사장님이나 점원분이 아는 척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곤 한다. 익명의 고객으로 카페를 찾았다가 나를 알아본 이의 반가운 인사에 마치 비밀스러운 정체를 들킨 듯 머쓱해지고 마는 것이다.
반면 친구 K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들르는 카페가 있는데, 자신이 주문도 하기 전에 알아서 커피를 내려주는 점원 덕분에 즐겁게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K가 늘 주문하는 커피는 누가 봐도 눈에 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 물은 반만'.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샷을 하나 추가하면서 물을 컵의 반만 담아달라는 요청이다. 이런 주문을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하는 손님이 있다면 점원은 분명 그를 기억할 것이고, 그가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알아서 먼저 커피를 내린다는 것은 점원의 배려이자 일종의 서비스일 테다.
나는 당신이 우리 카페의 단골손님임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커피 취향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죠. 늘 그랬듯이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 물은 반만' 맞죠? 갓 로스팅한 원두로 맛있게 커피를 내려드릴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마도 카페 점원의 마음은 이렇지 않을까.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얼굴을 보는 사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보는 사이, 상대의 확실한 취향 하나를 알고 있는 사이... K와 카페 점원 사이에는 뚜렷한 관계의 고리 하나가 생긴 셈이다.
"어떤 날에는 그 카페 점원의 기분까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니까. 어쩐지 오늘은 표정이 좋지 않네. 어젯밤 잠을 설쳤는지 피곤해 보이는군.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봐. 평소보다 더 반가워하는 얼굴이야... 하면서 나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더라고."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 반복적 만남을 통해 상대를 알아가고 서로를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면 K와 카페 점원은 이미 반은 친구가 된 것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K가 매일 그 카페에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취향을 알아주는 친절한 점원 때문임이 분명하다.
만약 나라면, 주문도 하기 전에 미리 내 취향을 알고 커피를 준비하는 점원이 있는 카페라면 가지 않을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을 들켜버린 기분, 과장되게 말하면 어쩐지 홀딱 벗고 서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혼자 카페를 찾을 때 나는 특정 카페의 단골이 되기를 거부한다. 카페 점원이 나를 기억할까 봐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 물은 반만' 같은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주문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익명성이 편하다.
어쩌면 단순히 '나'라는 사람을 알아보는 게 싫다는 문제가 아니라 카페 점원, 그러니까 낯선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카페의 단골이 된다는 것은 커피 구매자 이상이 되는 것이고, 카페 사용자를 넘어서는 일이다. 단골이라는 단어에는 어딘지 모를 정이 있다. 주인장과 손님의 오랜 시간이 단골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내 안의 따뜻함과 차가움을 나는 아주 잘 안다. 때로는 라테 같은 따뜻함이 우러나와 차가운 공기를 녹일 때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샷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쓰고 차가운 마음으로 살아간다. 관계를 맺기보다는 관계를 피하는 쪽을, 마음을 전하기보다는 마음을 외면하는 쪽을, 함께 있기보다는 혼자가 되는 쪽을 선택해왔다. 단지 그게 더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관계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면 분노와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나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경험하지 않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모두가 그렇게 관계를 맺으며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것일 텐데, 점점 좋았던 관계가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을 받아들이기가 갈수록 힘들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로를 알면서도 모른 척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게 아닐까 싶지만 그 역시도 현명한 답은 아닌 듯하다.
카페 산책자인 나는 오늘도 카페를 찾아 집을 나선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는 곳, 최대한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에 둥지를 틀고 싶다. 그러다 카페 점원이 혹시나 아는 척을 해오더라도 오늘만은 화들짝 놀라지 않으련다. 여전히 단골이 되는 건 싫지만, 한 번쯤은 나를 알아봐 주는 점원과 짧은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겠지.
정체가 들통나 봐야 뭐 별 게 있겠나. 간첩도 아니고, 비밀요원도 아니니 기껏 들킨다고 해봐야 나이스 한 겉모습 뒤에 꽁꽁 숨겨놓은 속 좁고 겁 많고 이기적인 모습 정도겠지. 그 정도라면 들켜도 괜찮지 않을까. 오히려 미리 들켜버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