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에 당첨되어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10년 전쯤 어느 지인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이다. 대답은 쉽게 나왔다. 로또에 당첨되어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여행 다니면서 글을 쓰며 신나게 살겠다고.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멋진 식사를 한 후 조용히 시간을 보내겠다고. 그리고 생각했다. 질문이 좀 진부한 거 아냐?
한참의 시간이 흐른 요즘, 이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성적 판단 없이 본능적으로 내뱉은 대답이 진짜 욕망에 가까울 수 있다지만, 나의 대답은 가짜였다. 그럴싸하게 내뱉은, 누구라도 그리 답할 것 같은 대답이었다. 알다시피 이 질문은 삶에서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다. 귀로 들은 질문은 뇌와 가슴을 거쳐 답이 되지 않은 채, 순식간에 입으로 흘러나왔다.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본 적 없는 자의 게으른 답이었다. 질문이 진부했던 게 아니라 답이 진부했던 거다.
몇 달 전, 오른쪽 발등에 금이 가 8주 간 깁스를 했었다. 깜빡이는 초록 신호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횡단보도로 급히 뛰어가다 그만 넘어진 것이다.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니 아무래도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약속되어 있던 공적인 일 외에 사적인 일은 전부 취소했다.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고 시간은 남아돌았다. 본의 아니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처음엔 마치 감옥에 갇힌 듯 답답했지만 점차 익숙해지니 쓸 데 없는 몸의 움직임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근육량이 줄어들면서 몸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많지 않기에 꼭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의 아니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알게 되었다. 10년 전 쉽게 내뱉었던 답이 가짜였다는 것과 아직 나는 진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창세기> 1장을 저술한 유대 지식인은 '바라(bara)'라는 히브리 단어로 '창조하다'를 표현했다. '바라'라는 동사의 피상적이며 거친 의미는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이다. '창조하다'라는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히 제거해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드는 것처럼,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심연>, 배철현, 21세기북스, p.109
만약 인생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창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배철현 교수의 말대로 창조가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는 것'이라면, '삶을 창조한다는 것'은 삶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끊임없이 제거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질문이 뇌와 가슴을 거치는 시간은 원하지 않는 것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의 시간이다. 도려내고 도려내어 끝내 남은 것을 발견하는 환희의 시간이다. 욕심이 많은 나는 아직도 도려낼 것이 많다. 그나마 점점 나이를 먹어가니 다행이다. 에너지 넘치던 젊은 날에는 미처 몰랐던 내 삶의 쓸데없는 것, 부수적인 것들을 알아가고 있으니. 이제 무엇을 도려내야 할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도려내고 도려내어 마침내 남게 된 것이야말로 내 삶의 핵심이자 간절한 무엇,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그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