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법의 시간들

by 조혜영


요즘 들어 부쩍 ‘그때 ... 했어야만 했는데’ 이런 말을 많이 하게 된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다 보니 이상과 현실 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 후회와 자책으로 이어지기에. 과거에 이렇게 했더라면 지금보다 현실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지 못한 선택에 미련을 가져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며칠 전 서점에 갔는데, 시집 코너에서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이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 큰 위안이 됐다. 시를 쓴 시인을 포함해 시를 읽은 모든 이들과 같은 감정으로 연결돼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혼자만의 고민은 아닌 것이다.


어떤 한 시기를 통과하는 동안에는 그 시간이 내게 건네는 질문조차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답을 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시기가 끝나고 난 후 한참이 지나고서야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그때의 질문과 답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니 가정법의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다. 하나의 긴 터널을 지나 나름의 질문과 답을 찾아냈다는 반증이기에.


그럼에도 가정법의 생각을 좀처럼 버릴 수 없어 괴롭던 중에 이문재 시인의 글을 읽게 되었다.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의 해설 부분이었다.


가정법이 많은 삶은 불행한 삶이다. 가정법을 자주 구사하는 삶은 이미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린 나이일 것이고, 성취하고자 하는 삶의 목표들이 너무 많다는 증거이다.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엮음, 열림원, P.132


여기까지 읽었을 때, 그만, 좌절했다. 아, 내 삶은 불행한 삶이구나... 나는 이미 늙었구나... 성취한 것보다 성취해내지 못한 목표들로 나의 시공간이 빼곡히 채워져 있구나... 하지만 적어도 시인이라면 이렇게 나를 좌절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인의 글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가정법의 문장을 전혀 구사하지 않는 삶처럼 메마르고 황폐한 삶이 또 어디 있으랴. 시집 제목부터 가정법이거니와, 이 가정법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우선 읽히지만, 이 후회와 반성은 곧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로 거듭난다.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엮음, 열림원, P.132


나의 영혼은 이 문장으로 구원받았다. "가정법의 문장을 전혀 구사하지 않는 삶처럼 메마르고 황폐한 삶이 또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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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바웃 타임>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그 시간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최고의 선택을 하게 될까? 완벽한 사랑을 하고,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영화의 결론은 '아니다'이다. 모든 선택은 하나의 원인과 결과가 되어 우리의 인생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다. 하나를 바꾸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수없이 많은 변수들이 작용해 불행을 낳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때의 선택은 그것으로 최선이었던 거라고. 그때의 선택이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니 현재 내 모습을 긍정하게 된다. 현재의 나를 있게 만든 모든 인연들과 시간들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된다. 그때의 그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으로 혹시 부자가 됐을지도 모르지만, 2019년 현재에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나는 가정법으로 불행해지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가정법을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내게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시간이기에.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은 말한다.


"마침내 난 시간여행에서 마지막 교훈을 얻었다...

이제 난 시간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오늘 이 날을 위해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매일의 하루를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완전하고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하루하루를 항상 시간여행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멋진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다."


5년 후, 혹은 10년 후 언젠가... 미래의 내가 2019년 오늘을 떠올리며 가정법의 생각을 하지 않도록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즐겁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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