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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Feb 18. 2019

미루기에도 나름의 미학이 있다면



나는 미루기의 달인이다. 특히 중요한 일일수록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버릇이 있다. 의뢰받은 글을 써야 할 때 특히 그렇다. 많은 창작자들이 하는 말이지만 내게도 데드라인이 영감의 원천이다. 일을 미루면서 나는 그 일과 전혀 상관없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기도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기도  한다. 이제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어 노트북을 켜 놓고 나서도, 지금이 아니면 데드라인을 넘기게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나는 마치 의식을 치르듯 손톱을 깎는다. 길게 자라지도 않은 손톱을 기어이 바짝 자르고 만다. 그래서 내 손톱은 늘 짧다. 매니큐어 같은 건 아예 칠하지도 않는다.


다행히 한 번도 데드라인을 어겨본 적은 없다. 데드라인에 딱 맞춰 일을 끝내려면 언제쯤 시작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문제는 일을 시작하기까지 미루고 미루는 그 시간이 너무 괴롭다는 데 있다. 딴짓을 하면서도 마음은 스스로의 게으름을 탓하거나 데드라인이 다가왔을 때 느낄 압박감을 떠올리며 늘 긴장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도 방학숙제를 하지 않고 버티다 개학 전날 밀린 일기를 쓰며 제발 내일 전쟁이 나서 학교에 가지 않게 되길 얼마나 바랬던가.


일을 체계적으로 잘 해내거나 시간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을 어떤 경외심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들이라면 내게 이런 충고를 해줄지 모른다. "그렇게 괴로워할 시간에 그냥 그 일을 해버려." 하지만 그쯤은 나도 안다. 어느 저자의 말처럼, 그런 충고는 불면증에 걸려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는데 "따뜻한 우유를 데워 마시고 편히 주무세요"라는 처방을 듣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혹자들은 말한다. 일을 자꾸 미루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까 봐 무의식이 일의 시작을 계속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위로는 되지 않는다. 그러다 얼마 전, 신문 신간 코너에 소개된 한 책의 제목이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 제목은 바로 <미루기의 천재들>.


미루는 바보들이 아니라 천재들이라니. 책을 소개하는 카피는 이랬다. '어쨌든, 아직은 때가 아니다. 꾸물거리고 빈둥거리며 창조적 영감을 기다리는 위대한 순간들에 관하여'. 게다가 우리가 익히 아는 찰스 다윈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천재들이 미루기의 달인들이었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었다. 이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는 미룰 생각이 없던 나는 즉시 서점으로 갔다(어쩌면 이 책을 사러 간 일이 중요한 일을 미룬 딴짓이었는지도).


그 역시 미루기의 달인인 저자는 미루는 시간 동안 하는 딴짓에 대해 역발상의 관점을 보여준다. 미루면서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미루기 위해 행한 그 일들이야말로 어쩌면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저자가 인용한 릴케의 문장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그 날들이 정말 심오한 활동을 하고 있는 때인 건 아닌지 나는 종종 되묻게 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사실 위대한 도약의 마지막 잔향일 뿐이고, 위대한 도약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보낸 시기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 <미루기의 천재들>,  앤드루 산텔라, 어크로스, p. 171~172



나를 찰스 다윈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천재와 동등한 자리에 올려 미루기를 합리화하려는 마음은 없다. 그들의 미루기는 창조적 영감을 기다리는 위대한 순간일지 모르지만, 나의 미루기는 말 그대로 게으르고 어리석은 잉여의 순간일 확률이 더 높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나는 조금이나마 위로받았다.


미루는 습관을 바꾸지 못하겠다면 그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데드라인을 어기지 않고 완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미루는 시간 동안 조금은 덜 자책해도 되지 않을까. 쓸모없다 여긴 게으른 시간들이 복잡한 뇌를 재정비하는 시간이거나 영감의 근원이 자리한 무의식으로 여행을 떠나는 시간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미루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덧붙인다. 우리가 일에서는 물론 사생활의 영역에서까지 생산성과 효율성에 집착하게 된 건 애초에 테일러 탓이라고. 테일러는, 말하자면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라고 할까. 그는 1907년 경영관리에 관한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주성은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우리가 내리는 명령에 따르고, 우리가 지시하는 일을 하며, 또 그 일을 빠르게 하는 것뿐이다."


테일러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일을 미룰 것이다. 자주성을 갖고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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