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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an 29. 2019

목숨이 그것에 달린 것처럼



오랜 친구가 새해 다짐처럼 이런 얘기를 했다. 


“나 말이야, 이제 오래 매달리기를 제대로 한번 해보려고...” 


친구와 나는 성격, 취향, 라이프 스타일 등 많은 것들이 대척점에 있지만 유일한 공통점이 바로 오래 매달리기를 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마 그 부분에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운동신경이 좋지 않은 나는 체력장이 너무 싫었다. 윗몸일으키기와 던지기도 잘 못했지만 오래 매달리기는 정말 최악이었다. 양손으로 철봉을 움켜쥐고 턱을 올린 순간, 시작과 함께 하릴없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버틴 시간이 길어야 3초는 될까. 만점인 23초 동안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같은 반 친구들을 보면서 이상한 열등감에 휩싸이곤 했다. 


어림잡아 15년 간 친구를 만나면서 오래 매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를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친구도 나와 같은 열등감을 경험했기 때문이었고, 그 기묘한 감정이 성인이 된 이후까지 인생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만 같은 불편한 느낌 때문이었다. 오래 매달리기를 잘하는 것은 키나 덩치, 체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깡마르고 연약해 보이던 친구들이 이를 악 물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너무도 태연하게, 철봉과 하나가 된 채 언제까지고 그 자세로 있을 수 있다는 듯 매달려 있는 모습은 내게 기이한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렇다. 오래 매달리기는 근성으로 하는 것이다. 친구와 나는 '근성 부족'이라는 공통점으로 서로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학창 시절 오래 매달리기를 잘했을 법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그 사람과 내가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같은 철봉에 매달려 오래 매달리기를 하고 있고, 시작과 함께 어김없이 내가 먼저 떨어지고 마는 시나리오... 그 사람은 태연하게 철봉에 매달린 채 3초 만에 떨어진 나를 비웃고 있는 모습... 그렇게 나는 그 사람과 일을 하기도 전에 기가 죽고 말았다. 이런 패턴이 나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한 적도 있었다. 오래 매달리기 따위 세상 살아가는 데 무슨 소용이람? 꼭 근성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악착같이 매달려서 살아남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 아니야? 그런 태도가 경쟁을 만들고 세상을 더 팍팍하게 만드는 거라고? 난 힘 빼고 천천히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거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이런 생각이 자기변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누군가는 힘 빼고 천천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가슴 깊이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 매달리는 것이 힘들어서 내린 도피에 불과했다. 설사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조차도 인생의 어느 순간 한 번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래 매달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힘든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간 재하(류준열 분)의 경우도 사과를 제대로 수확하려면 농사꾼으로서의 근성을 발휘해야 할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다행히 친구와 나는 '근성 부족'이라는 공통점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장 욕망'. 어떻게든 더 나은 내가 되고 싶고, 더 멋진 모습으로의 성장을 꿈꾼다는 점이다. 그런 친구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제대로 한번 오래 매달리기를 해보고 싶단다. 나 역시도 같은 다짐을 한다. 도망가지 않고, 핑계 대지 않고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나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매달려 보겠다고. 


책 <처음 만나는 마음챙김 명상>의 저자 존 카밧진 교수는 이런 표현을 좋아한다고 한다. '당신의 삶(목숨)이 그것에 달린 것처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글쓰기를 거부당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고백해보십시오.릴케의 이 조언은 목숨 걸고 글을 쓰라는 말이다. 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목숨이 그것에 달린 것처럼 최선을 다해 매달려 본 적이 있었는가?  대답은 '아직 없다'이다. 행여 목숨에 해라도 입을까 조금만 힘들어도 인내하지 않고 육신의 평온만을 우선순위로 두었음을 고백한다. 슬렁슬렁, 대충대충 살아왔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다짐을 이야기했다.


"철봉 밑에 악어떼가 득실거리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떨어져 죽지 않으려면 끝까지 매달려야지. 별 수 있겠어?" 


끝까지 힘을 쥐어본 자만이 힘을 뺄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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