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고등래퍼2>의 우승자인 김하온을 경연 초반부터 눈여겨봤었다. 학년별 싸이퍼 대결에서부터 그의 랩은 어쩐지 다른 구석이 있었다. 특히 랩 가사가 그랬다.
"물결 거스르지 않고 즐겨 트랜서핑(transurfing)
원한다면 곧장 내 손으로 들어올테니...
깨어있기를 반복해도
머리 위로 흔들리는 펜듈럼(pendulum)..."
- <학년별 싸이퍼 대결> 중
"바코드가 붙었다면 I'm on conveyor
외부와 내부의 의도를 동시에 쥐고 달려..."
- <바코드> 중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지만 just swervin'
가능태를 따라 흐르듯이..."
- <붕붕> 중
김하온의 랩 가사에 종종 등장하는 단어들(붉은 글씨로 표현된)은 러시아(엄밀히 말하면, 구 소련) 양자물리학자가 쓴 <리얼리티 트랜서핑>이라는 책 속의 용어들이다. 10여 년 전, 우연한 기회로 그 책(전 3권)을 건네받고는 마치 우주의 비밀을 캐내려는 사람처럼 3차례나 정독을 했었다. 그러던 차에 김하온의 랩 가사 속 단어들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하온, 너도 그 책을 읽었구나.'
<리얼리터 트랜서핑>이 어떤 책인지 소개하기 전에, 하나의 에피소드를 더 이야기하자면 래퍼 스윙스에 관한 것이다. 몇 달 전, Mnet에서 방영한 <니가 알던 내가 아냐>란 프로그램에 스윙스가 출연했었다. 스윙스의 엄마와 여자친구, 친구들이 스튜디오에 나와 스윙스의 일상을 촬영한 영상을 보며 문제를 맞히는 프로그램이다. 영상 속에서 스윙스는 평소 책 읽는 걸 좋아한다면서 여자친구와 함께 독서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독서모임에서 그가 추천한 책이 바로 <리얼리티 트랜서핑>이었다(스윙스는 이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지도 모르지만, 이쯤 되니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요즘 대한민국 래퍼들 사이에서 <리얼리티 트랜서핑>을 읽는 게 트렌드인가? 어쨌거나 나는 반가웠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살아온 배경도 너무 다르지만 하나의 책을 통해 김하온, 스윙스와 서로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리얼리티 트랜서핑>은 한때 유행했던 책 <시크릿>의 양자물리학자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생각(사념 에너지)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내용을 전제로 한다.
1. '트랜서핑(Transurfing)'이란?
트랜서핑이란 말은 다른 쪽으로 옮겨간다는 뜻의 trans와 파도타기를 뜻하는 surfing을 합쳐서 저자가 만들어낸 말이다(역자 주).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서퍼가 균형을 잡으며 파도를 타듯, 인생의 파도를 자유자재로 타며 운명의 창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2. 가능태
우주에는 가능태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 가능태 안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으로, 저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모두 존재하는 가능태를 골라 인생의 트랙을 옮겨가면 된다고 한다. 마치 LP 레코드판에서 자신이 원하는 곡을 듣기 위해 바늘을 그 트랙 위로 옮겨 놓듯이(이 내용은 평행우주 이론과도 맞닿은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왠지 어렵고 아리송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어떻게 인생 트랙을 옮겨 가라는 거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데...
3. 내부의도와 외부의도
인생 트랙을 옮겨가려면 내부의도와 외부의도가 일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내부의도는 우리가 생각(의식)으로 만들어내는 의도를 말하고, 외부의도는 마음 깊숙이 영혼(무의식)이 바라는 의도이다. 예를 들어 내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우승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부의도이지만, 의부의도인 영혼은 우승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우승하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볼 거고 그러면 피곤해질 수 있으니까, 그중에는 나를 싫어하는 안티들도 있을 수 있으니 우승을 하는 것이 영혼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두려울 수 있는 것이다(실제로 우리는 갇혀있는 방을 나가기를 소망하며 한 손으로 문을 연다고 하면서 반대 손으로 문을 닫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다).
김하온이 말하는 '내부와 외부의 의도를 동시에 쥐고 달린다'는 것은 바로 이 말이다. 갇혀있는 방에서 진정 나가길 원한다면, 왼손과 오른손 모두 손잡이를 부여잡고 동시에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4. 펜듈럼
김하온이 학년별 싸이퍼 대결에서 한 랩 속 가사에는 '펜듈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펜듈럼은 인생의 서퍼가 자유자재로 운명을 창조하는 것을 방해하는 에너지를 뜻한다. 쉽게 말하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을 비롯한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다. 김하온은 <Graduation>이라는 곡에서 이렇게 랩을 한다.
"잠깐, 왜 있지도 않은 싸움을 만들어 펜듈럼이 흔들리게 하나..."
있지도 않은 싸움이란 갈등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에너지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작동하는 순간 펜듈럼이 흔들리면서 우리의 순수한 의도를 방해한다. 그러니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펜듈럼에게 에너지를 뺏기지 않도록 긍정적인 생각을 더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힘을 얻는 방법이다.
이번 <고등래퍼3>에서 김하온은 그루비룸 팀 양승호의 세미파이널 경연에 피처링으로 함께 참여했다. 경연 초반과 달리 급격히 자존감이 떨어진 모습을 보이던 양승호에게 김하온은 말한다.
"너의 미래를 만드는 건 사념에너지의 주파수야. 중요성을 낮추고 편하게 해... 현재만이 존재해... 즐겨. 무대에서 자유로워야 돼..."
이 말에 위태위태하던 양승호는 자존감을 회복했고 김하온과 함께 무사히 경연을 마친 후 파이널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것은 사념에너지, 우리의 생각이다.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 중요성을 낮춘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긴장하게 되지 않던가. 무언가를 반드시, 꼭 가져야만 한다고 집착하는 순간 원하는 것이 더 멀어져만 가던 느낌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중요성을 낮추면 별 게 아닌 게 된다. 별 게 아닌 게 되면 자유롭게, 편하게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하온의 랩 가사 속에는 '거울(mirror)'이란 단어도 자주 등장한다. <리얼리티 트랜서핑>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우리의 생각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고 한다. 원치 않는 상황을 보게 되는 것의 원인은 결국 내 안의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못마땅하다고 해서 거울을 바꿀 수는 없다. 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거울을 수백 번 바꾼다 한들, 비치는 모습은 그대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단, 마음을 바꾸더라도 거울에 비치는 상이 바뀌는 데는 시간이 다소 걸린다고 한다. 좋은 현실이 그 자리에서 즉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아마도 새로운 가능태 공간이 펼쳐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그러니 인내와 연습은 필수다.
다소 어려운 내용을 책으로 읽으며 반신반의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김하온이 래퍼로서 자신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을 보니 트랜서핑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그가 했다면 나도, 당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 아니 감독이기를 꿈꾸니까. 서퍼가 되어 인생의 파도를 신나게 타봐도 좋을 것 같다. Love & Peace.
(++ 참고로, 3권으로 구성된 <리얼리티 트랜서핑>을 읽는 게 부담스럽다면 한 권으로 정리된 책 <트랜서핑의 비밀>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