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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Apr 23. 2019

결국, 봄날은 가더라도...

선우정아의 '그러려니'와 이소라의 '봄'

며칠 전, 아쉬탕가 요가를 마치고 마지막 사바아사나 시간. 대자로 매트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데, 요가원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낯선 음악이 흘러나왔다. 토요일 밤이었고, 벚꽃이 한창이던 봄날의 밤이었다. 잔잔한 리듬을 따라 읊조리듯 노래하는 덤덤한 목소리... 역동적인 요가 동작을 막 끝낸 터라 한껏 열려있던 몸속으로 가수의 목소리가 깊이 스며들어왔다. 잘 지내니... 잘 지내겠지...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그러려니... 이 노래 뭐지? 그렇다. 나는 이 노래에 첫눈, 아니 첫 귀에 반했다.


요가원을 나오며 휴대폰으로 가사를 검색해보니 노래는 선우정아의 '그러려니'였다. 그리고 며칠 째, 무한반복 이 노래를 듣고 있다. 한 여자가 있다. 어느 날 어느 때, 여자는 문득 지나간 사랑이 떠올랐다. 아직 그에게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잘 지내고 있는지... 끝난 인연이기에 차마 소식을 물을 수는 없지만 그저 잘 지내겠지 혼자서 답해보는 것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할 뿐이다. 쓸쓸하지만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덤덤히... 어차피 사랑이란,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부질없이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다 그러려니...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
잘 지내니
문득 떠오른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겠지
대답을 들을 수 없으니 쓸쓸히 음 음...
그러려니

- 선우정아 '그러려니'


듣는 이에 따라 헤어진 옛 연인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에겐 내 곁을 스쳐간 모든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혔다. 그 지나간 시간 속에는 사랑했던 사람도, 미워했던 사람도, 어리석었던 선택과 후회, 찬란했던 추억의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이미 지나갔기에 그 시간들이 그립다가도, 또 이미 지나갔기에 같은 이유로 나는 그 시간들에 허무를 느낀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렇게 때로는 그리워하다가 때로는 허무해하면서 그러려니 살아갈 수밖에. 선우정아 특유의 덤덤한 목소리가 그런 나를 위로한다. 덕분에 나는 과거의 나에게,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또 나를 상처 주고 내가 상처 준 이들에게 조심스레 안부를 물어본다.


다들, 잘 지내나요? 잘 지내고 있겠죠.


내가 사는 6호선 월드컵 경기장역 2번 출구 앞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다. 매년 이맘 때면 지하철을 타러 갈 때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는 일이 특별한 즐거움이 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길면 열흘, 짧으면 일주일 안에 벚꽃은 지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에 비례해 아쉬움도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시 1년 후, 봄을 기다리는 수밖에...


봄이 되면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이 국민 테마곡이 된 지 오래지만, 나는 이소라의 '봄'이 듣고 싶어 진다. 선우정아와는 조금 다른 색깔로 이소라도 지나간 사랑을 노래한다. 선우정아의 노래 속 화자처럼 '문득' 그가 떠오른 것이 아니라 이소라의 '봄' 속 화자는 하루 종일 그대 생각뿐이다. 꿈에서도 보일 만큼 그리운 당신을 쉽게 잊지 않을 거라고, 여름이 가고 가을 오면 당신에 대한 원망도 깊어지지만 겨울 지나 봄이 오면 또다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단다. '봄' 속 화자에게 봄은 그런 계절이다. 나를 떠나간 그대를 다시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얻는 계절...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그런 계절이 차갑고 삭막한 계절보다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기엔 더 나은 계절인 것이다. 선우정아의 노래 속 화자처럼 덤덤하지 않고 애달프다. 애달파서 더 마음이 간다. 마치 아픈 손가락처럼...  


이소라 6집 앨범 <눈썹달>


어차피 봄날은 가게 되어 있지만, 우리는 지나간 봄에게 안부를 물으며 혹은 다가올 새봄을 기다리며, 그렇게 덤덤하게 혹은 애달프게 살아가는구나... 그렇게 살아내고 있었구나... 새삼 봄의 새싹을 닮은 인간의 생명력이 참 귀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봄이 가고 여름이 올 것이다. 잔나비의 노래처럼 뜨거운 여름밤도 역시 가고 말 것이다. 남은 건 볼품 없는 허무일 뿐이라도, 뜨거운 여름을 기다려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야 할 어떠한 이유도 찾지 못할 테니... 어쨌든 나는 하루 종일 '그대'만 생각하며 사계절이 수십 번, 수백 번 지나가더라도 그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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