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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Apr 30. 2019

취향의 온도차

타인의 취향과 나의 호불호 사이에서 관계를 고민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서로의 취향에 대해 극명하게 차이를 느끼는 순간 말이다. 대화 상대가 평소 서로의 취향을 훤히 알고 있는 친한 사이라면 문제는 없다. 아직 친한 사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안 친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서로 알아가는 단계에 있는, 앞으로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상대와의 대화일 때 취향의 차이는 다소 문제가 될 수 있다.


어느 모임에서 지인 한 분이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을 내게 추천해주었다. 앞선 대화에서 '잔나비'와 '검정치마'의 음악에 대해 공감하며 대화를 이어갔던 터라 그분이 추천해준 밴드의 음악이 궁금해졌다. 들어보니 나쁘진 않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내겐 좀 우울하게 들렸다. 우울한 정서의 음악을 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 밴드의 음악은 조금 무거웠다.


며칠 후, 지인을 다시 만나게 됐고 나는 추천해준 밴드의 음악을 들어보았다며 먼저 말을 꺼냈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넘어가도 됐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쩐지 관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나는 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하게 내 느낌을 말해도 될까? 상대가 그토록 좋아하는 밴드인데 혹시 내 솔직한 표현이 그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예전의 나는 서로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이 불편해 우회로를 택하곤 했다. 들어보니 나도 좋았다면서 적당히 말하는 것이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렇게 표현한 건 미성숙한 태도였다. 지속적인 관계에도 좋지 않았다. 상대에게 이미 나는 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자신의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던 나는 그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취향을 공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편해진 나는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이건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그런 일련의 경험들을 겪은 후, 태도를 바꿔 가능하면 솔직하게 나의 취향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말씀하신 밴드의 음악, 들어봤어요. 가사가 되게 심오하네요. 연주도 좋고. 근데 제겐 좀 우울하게 들렸어요."

나로서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그분의 취향을 존중하며 내 느낌을 전달한 것이었다.

나의 말에 지인의 표정이 살짝 굳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자신이 할 말을 찾고 있는 듯 보였다.

"음... 우울? 그 밴드의 음악이 우울하진 않은데... 뭐랄까, 우울하기보다는 애잔하다고 할까..."


아, 내겐 우울한 감정이었던 것이 그분에겐 애잔한 것이었구나... 그 순간, 취향의 차이라는 것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감정은 주관적이다.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도 안에서 축적된 것이기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감정은 저마다의 온도와 무게를 지닌다. 나의 애잔함과 그의 애잔함이 같을 수 없고, 나의 우울함과 그의 우울함이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가 표현하는 감정의 언어를 알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표현하는 감정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가 살아온 삶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가 살아온 삶의 맥락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면 취향이 달라도 우리는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성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않을까.


때로 취향은 또렷한 경계를 만든다. 취향은 한 개인의 개성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타인의 취향 앞에서 우리는 저만치 소외되기도 한다. 취향이 우월감을 만들 때도 있고, 고급스러운 누군가의 취향 앞에서 나의 소소한 취향은 지극히 시시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취향을 드러내는 일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취향이야말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설픈 '일치' 보다는 뚜렷한 '차이'가 관계를 더 나아가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내게 우울하게 들렸던 것이 어떻게 그분에겐 애잔함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나는 그분과 분명 '아는 사이'지만, 아직 그분을 알지 못한다. 그분이 말하는 '애잔함'의 맥락을 좀 더 알아간다면 그분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될까. 그분이 추천했던 밴드의 음악을 다시 한번 들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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