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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un 08. 2019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슬픔의 위안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글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출처. 다음 영화) 
"요동치는 파도보다 더 깊은 감정의 파고가 가슴을 뒤흔든다."


영화보다 포스터를 먼저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슬픔이 묻어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에메랄드그린과 민트를 섞어놓은 듯한 바다색과 맑은 하늘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남모를 슬픔을 간직한 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마음속으로 포스터에서 여자 모습을 지워보았다. 평화롭긴 했지만 아름답진 않았다. 바다와 하늘 때문에 아름다움을 느낀 건 아니었다. 여자의 모습을 웃고 있는 앞모습으로 바꿔 보았다. 행복해 보였지만 역시 아름답진 않았다. 


결국 내게 아름다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킨 것은 슬픔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실을 경험한 나약한 인간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슬픔을 품은 채 그 슬픔과 당당히 마주하려는 어떤 힘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의 당당함은 기세 높은 위풍당당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슬픔을 마주하고 응시할 수 있는 용기가 만들어내는 한 인간의 아우라 같은 것 말이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이야기를 담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도쿄 기담집>에 들어있는 단편이다. 

주인공 사치는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으로 떠난 아들이 서핑 중 상어에게 다리를 물려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화 초반, 낯설게 다가온 것은 아들을 잃은 사치의 반응이었다. 슬픔을 느끼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거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자식을 잃은 여느 엄마와 달리 너무 덤덤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사치가 죽은 전남편을 미워하고 있고 아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뒷얘기가 나오면서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슬픔의 감정을 빨리 지워버리거나 밀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참, 차갑고 냉정한 엄마다...    


그 후 십 년 동안 그녀는 아들의 기일을 전후로 하여 매년 하나레이 해변을 찾는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거나 해변에 앉아 책을 읽으며 보내는 하나레이 해변에서의 일상이 사치만의 슬픔을 치유하는 의식인 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에게서 슬픔으로 인한 절망이나 슬픔의 폭발 같은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출처. 다음 영화)

그러던 어느 날, 사치는 일본에서 서핑 여행을 온 두 청년에게서 '외다리 일본인 서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때부터 사치의 감정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해변에서 외다리 일본인 서퍼를 보았다는 청년에게 외다리가 어느 쪽 다리었냐고 묻는 사치. 오른쪽 다리라고 말하는 청년(사치의 아들도 상어에게 오른쪽 다리가 물려 사망했다)의 대답을 들은 사치의 호흡은 빨라진다. 사치로 분한 배우 요시다 요의 연기는 죽은 아들에 대한 슬픔을 억누르고 있던,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아파하며 아들을 보고 싶어 한 엄마의 감정을 섬세한 연기로 표현해낸다. 앞가슴의 미묘한 떨림과 숨길 수 없는 호흡의 변화는 사치가 그동안 얼마나 슬펐을지, 그 슬픔을 밀어내기 위해 또 얼마나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했을지 직감하게 한다.           

 (출처. 다음 영화)

'기담'이라는 이야기답게 외다리 일본인 서퍼가 진짜로 나타났었던 건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등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외다리 일본인 서퍼에 대한 청년의 언급은 사치의 슬픔을 꺼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치는 영혼이든 귀신이든 죽은 아들을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해변을 헤맨다. 10년 간 꽁꽁 묻어두었던 슬픔을 꺼내며 사치는 분노하고 원망하고 때리고 집어던지고 소리 지른다. 그런 거친 과정을 지나고 나서 아들을 잃은 궁극의 슬픔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물건을 처치하듯 박스에 묻어놓았던 아들의 유품을 10년 만에 다시 꺼내 찬찬히 정리하는 사치. 그 가운데 오래된 워크맨 카세트를 발견하고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한다.  


사실 그 워크맨 카세트는 마약을 하다 다른 여자의 집에서 죽은 남편의 것이었다. 마약을 흡입하고 사치의 남편은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춤을 췄다. 죽도록 미워한 남편이었지만 사치는 그 카세트를 버리지 않았고, 그 카세트를 아들이 듣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사치의 귀에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흥겨운 음악이 들려오고... 그 장면에 이어서 같은 카세트테이프에 헤드폰을 꽂고 같은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로 해변을 달리는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사치가 죽은 아들과 그 순간 연결된 것처럼. 혹은 어디선가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살아있는 아들이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내 기억에 이 장면에서 아들의 자전거에 매달려 있던 서핑보드는 파란색이었다. 죽은 아들이 타던, 상어에게 반쯤 물어뜯긴 서핑보드는 분명 빨간색이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서핑을 하며 건강하게 살고 있는 아들과 이 세계의 사치가 음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온전히 슬픔을 응시한 사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지... 혼자 상상해 본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달리는 사치의 아들 (출처. 다음 영화)


최근 읽기 시작한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슬픔은 무거움이다. 슬픔(greif)이란 단어는 '무겁다'는 뜻의 중세 영어 gref에서 왔다. 사람들이 슬픔을 말할 때 가장 흔하게 쓰는 형용사는 '참을 수 없는'이다. 슬픔은 참아야 할 무엇이자 짊어져야 할 무거움인 것이다. 

-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현암사 

아들을 잃은 사치에게도 슬픔은 참을 수 없지만, 참고 짊어져야 할 무거움이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날 찾아온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기까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커다란 상실에 마주한 순간, 슬픔만이 나를 안아주네.'


슬픔 때문에 괴로운 것일 텐데, 슬픔만이 나를 안아준다고? 아직 진정한 슬픔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나는 이 말에 대해 미루어 추측해볼 뿐이다. 슬픔을 오롯이 마주하고 응시하는 순간 그 슬픔이 상실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거라고.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는 바로 그 슬픔이라고. 슬픔만이 슬픔을 위로할 수 있다고. 아이러니하지만... 사치가 슬픔을 외면하고 회피할 때가 아닌 슬픔을 마주한 이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있게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슬픔 이후의 삶은 어떻게 계속되어 갈까? 자신의 슬픔과 마주하고 치유의 과정을 겪고 난 후, 사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 <하나레이 베이>의 마지막 구절로 이 글을 정리하고 싶다. 


피아노를 치고 있지 않을 때에는 가을이 끝나갈 즈음에 3주일간 하나레이 베이에 체류했던 일을 생각한다. 밀려드는 파도 소리와 아이언 트리의 산들거림을 생각한다. 무역풍에 떠내려가는 구름, 날개를 커다랗게 펼치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앨버트로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지금 현재, 그것 외에는 떠올릴 만한 아무런 생각도 없다. 하나레이 베이.

- <도쿄 기담집> 중 '하나레이 베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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