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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un 14. 2019

영화 <갤버스턴>, 세상 끝의 사랑

사랑인듯 연민 같고, 동정인 듯 사랑 같은...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글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구나 벗어나고 싶은 지옥이 있다."


지상 위에 지옥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세상 끝, 삶의 밑바닥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 남자가 있다.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도망자 신세가 된 남자와 여자, 그들은 운명은 어떻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예상대로 비극이다. 하지만 폭풍 같은 삶의 한복판에서도 마치 태풍의 눈처럼 평화로운 시간은 존재한다. 그것이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말이다. 그들의 지옥 같은 삶에서 잠깐의 낙원이 되었던 장소, 그곳이 바로 갤버스턴이다. 


성폭행,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 살인, 시한부 인생... 등 영화 속에서 지옥 같은 삶을 표현할 때 자주 나오는 클리셰가 영화 <갤버스턴>에도 등장한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스토리가 벤 포스터와 엘르 패닝 두 배우의 섬세한 명품 연기로 되살아났다.           


영화 <갤버스턴>에서 '로이'로 분한 벤 포스터 (출처. 다음 영화)  

영화는 거센 폭풍과 함께 시작된다. 로이는 폐에 문제가 있어 검사를 더 해봐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지도 않고 병원을 나온다. 자신이 살아온 밑바닥 생활에 대한 분노와 자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한 채 보스의 명을 받고 누군가를 살해하는 로이. 로이는 그곳에 붙잡혀 있던 낯선 여자, 록키를 구해 살인 현장으로부터 멀리 도망친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길 위를 떠도는 로이와 록키의 인생 (출처. 다음 영화)

돈을 가져오겠다며 자신이 살던 집으로 들어간 록키. 잠시 후, 집 안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록키는 자신의 동생이라는 어린 소녀를 데리고 로이의 차에 급히 올라탄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로이에게 의붓아빠에게 겁을 주려고 총을 쏘았지만 벽에 맞았을 뿐, 죽이진 않았다면서...

과거의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록키 (출처. 다음 영화)

그렇게 로이와 록키, 록키의 동생 티파니는 갤버스턴의 한 모텔에 머물며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게 되는데...

로이는 록키를 볼 때마다 마치 자기를 보는 것 같다. 록키의 슬픔과 두려움이 자신을 닮았다. 록키의 삶에 공감하던 로이는 티파니가 실은 의붓아빠의 성폭행으로 낳은 록키의 딸이며, 그날 록키가 의붓아빠를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 사실을 로이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엘르 페닝의 연기가 빛났다. 그녀의 슬픔에 공감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으니). 

동생이라고 했지만 사실 록키의 딸이었던 티파니 (출처. 다음 영화)

자신도 한 번쯤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다는 록키. 록키의 입장에서 '제대로' 산다는 것은 어떤 걸까? 여느 열아홉 청춘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연애를 하고 소소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일상을 갖는 것... 록키에겐 꿈같은 일이다. 현재 록키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딸 티파니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 밑바닥 삶을 벗어나는 것. 그런 그녀에게 마흔 살 아저씨 로이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사랑인 듯 연민 같고, 동정 같지만 혹은 사랑 같은... 미묘한 감정으로... 

갤버스턴의 바다에서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록키와 티파니 (출처. 다음 영화)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아.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야."


로이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록키와 티파니를 지켜주는 데 바치기로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후회로 가득 찬 자신의 밑바닥 인생도 구원될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갖고서... 그것이 사랑인지는 로이 자신도 알지 못한다. 

로이와 록키의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 (출처. 다음 영화)

하지만 두 사람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을 좇던 무리들에게 록키는 살해당하고, 로이는 티파니를 지키기 위해(보스의 변호사가 티파니를 법정에 세우겠다는 협박을 한다)  보스의 죄까지 뒤집어쓰고 20년간 복역한다. 


20년 후. 폭풍이 불어오는 어느 날. 20대의 여자가 로이의 집을 찾아온다. 성인이 된 티파니다. 수소문 끝에 찾아왔다는 티파니에게 록키가 실은 언니가 아니라 엄마였다는 것을, 너는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로이... 


영화는 빨간 원피스를 입은, 가장 아름다웠던 록키의 웃는 모습과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현재의 로이를 교차해 보여주며 끝이 난다. 세상 끝의 사랑 이야기지만, 절절하고 애달픈 사랑은 아니다. 한 번도 시작한 적 없지만, 끝내 완성은 된 사랑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있다. 로이가 불치병에 걸린 게 아니라 치료가 쉬운, 그것도 국가에서 치료비도 지원해주는 폐질환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에선 좀 허무했고... 로이와 록키의 관계가 깊이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갑작스러운 록키의 죽음이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성인이 되어 찾아온 티파니에게 로이가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에선 주제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려는 느낌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남녀의 감정선에 관객이 공감하며 따라가는 데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물론 나의 주관적인 감상일 수 있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며, 깊은 감정의 잔상이 남기보다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슬픈 노래를 부르며 과잉된 감정을 표현하는 가수처럼, 영화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건 아닌지... 관객의 마음에 잔잔히 스며들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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