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6일 월요일, 운명처럼 행복하기만 한 일
아란과 아침 겸 점심으로 청귤소바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계획대로라면 아침 일과를 모두 마치고 인근 헬스장에 한 달 권을 등록한 뒤 운동까지 빡세게 하고 나오기 위해 일곱 시에는 일어났어야 했는데, 제주도에서까지 계획에 얽매여 육신을 피곤하게 만들지 말자고 자신과 타협하며 아홉 시에 일어났다. 헬스 등록을 조금 미루고 아침 일과의 마지막 일인 글쓰기까지 마친 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아란을 만나러 갔다.
제주도에 오기 몇 주 전에 비건을 결심했었다. 결심한 지 사흘 뒤 아란을 만나 채식주의자가 됐다 고백했다. 식도락 여행을 즐기던 아란과 나에게 나의 채식 선언이란 마치 커밍아웃하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음식 폭이 좁아져서 아쉽고 서운할까 봐. 내 우려와는 다르게 아란은 존중한다 말했다. 그리고 같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열심히 찾아 주었다. 항상 뭐 먹으러 가자 하고 개좋다 말하는 것이 3초 컷이었던 우리였는데 급격히 좁아진 음식 폭에 서로의 마음에 차는 음식 찾기가 영 쉽지 않았다. 그렇게 음식 계획을 방황하던 중 아란이 가고 싶던 곳이 청귤을 토핑으로 올려 주는 소바집이었다. 소바는 비건 음식이 될 수 있느냐 물었고, 쯔유에 가다랑어포가 들어가서 완전한 비건 음식은 아니었지만 나를 배려하는 아란의 마음에 국물은 타협하겠다 말했다. 세트 메뉴에 톳을 토핑으로 올려 주는 유부초밥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는데, 지단이 들어있어 나는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 궁금했다. 혹시 지단을 빼 주실 수 있냐고 물어야겠다 다짐하고 주문하러 갔다.
"그럼요, 당연하죠. 혹시 비건이세요? 그럼 저희가 가쓰오부시 안 들어간 비건 쯔유도 준비되어 있거든요. 그렇게 해 드릴까요?"
감사하게도 먼저 물어봐 주셨고, 그렇게 모든 우려가 필요 없어졌다. 비건 쯔유가 있다고 콩콩 뛰며 아란에게 달려갔다. 아란은 다행이라 그랬다. 제주도 비건 지도에도 없던 식당이었는데 아란 덕분에 비건 옵션 가능한 식당에 오게 됐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지단을 뺀 유부초밥에는 당근을 더 채워 주셨고, 사장님께서는 비건 음식과 논 비건 음식이 잘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러 얼굴을 한 번 더 비쳤다. 다정하고 친절한 마음에 걸맞게 훌륭한 음식이었다. 비건은 매 순간 고백할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 가끔은 숨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데, 이런 다정함을 만날 때마다 더 다짐하게 된다.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는데 내가 작아지면 안 되겠구나.
어제 갔던 무상찻집을 아란도 궁금해해서 데리고 갔다. 아란은 냉침 차와 양갱을, 나는 또 도라지차를 마실까 고민하다 구기자차를 시켰다. 음료를 설명해 주시며 사장님께서는 이틀 연속 방문한 나에게 자연스러운 아는 체를 했다. '아시겠지만' 차를 이쪽으로 옮겨 드시라고. 일 년 만에 방문했을 때에도 여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루 만에 방문했을 때에도 역시나 여전히 다정한 곳이었다.
차를 마신 뒤 아란은 부지런히 집안일을, 나는 헬스장을 등록하러 갔다. 등록하며 내 나이를 가지고 꺾였느니 어쩌느니 하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초면에 저런 실례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떠날 날이 정해져 있는 삶에서는 누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었다. 그저 헬스장에 기구가 많아서 좋았고, 자극이 잘 와서 좋았고, 못 본 기구들이 많아서 좋았다. 등과 가슴 운동을 하고 유산소를 타러 갔는데 꺾였남이 와서 물었다. 기구는 다 괜찮았냐고. 혹시 궁금한 기구 있으면 물어보라고. 슬쩍 보니 자세 잘 나오는 것 같아서 원래 운동하던 분인 것 같다고, 맞냐고. 대충 조금 해 봤다고 하고 궁금했던 등 운동 기구를 물었다. 알맞은 무게를 맞춰 주며 내 견갑을 잡아 주었고, "너무 좋은데요? 너무 잘 쓰는데요? 알려 줄 게 없는데요?" 했다. 뿌듯하군요? 하고 유산소 달렸다.
운동을 마친 뒤에는 아란과 독립 서점에 갔다가 칵테일을 마시러 가기로 했다. 서점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지만 재미있는 책들이 많았다. 독립 서점의 묘미는 내가 좋아하는 사소함이 많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잘 팔리는' 책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보고 느끼고 혼자 생각한 작고 사소한 것들이 즐비하다. 예컨대 이런 것들.
가끔 이런 책들을 통해 세상에는 이렇게 재미있는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 웃음이 샌다. 다 재미없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아도 이렇게 재미있는 생각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이런 사람들 어디 있나 찾고 싶을 때에는 책을 더 봐야지.
5월에 태어난 아란과 나는 생일에 의미 부여 하는 일을 좋아한다. 탄생화든, 탄생석이든 우리 것들이라면 눈을 반짝이고 손에 넣으려 한다. 그래서 작년에 함께 왔던 제주에서는 탄생석 팔찌를 샀었고, 이번에는 탄생석을 모티브로 한 칵테일이 있다기에 참을 수 없다며 마시러 갔다. 5월의 에메랄드 칵테일은 예쁜 불량식품 맛이 났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태어난 7월, 8월의 칵테일을 연달아 마셨다. 아란의 7월은 강한 와인이 들어갔고, 나의 8월은 코코넛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모두 5월보다 맛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코코넛이 들어가서 좋다고 말했고, 아란은 그냥 7월에 태어난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고 그랬다. 나도 8월생 걔 좋아해서 맛있거든? 하면서 툴툴대고 웃었다.
아란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잘 안다. 그중 하나는 예쁜 말들이다. 예쁜 말들을 가사에 적어 내는 데에도 궁금증을 느껴 작사 수업을 듣는다. 요즈음은 작사의 영감을 위해 하루에 딱 한 문장만 적는다면 가장 마음에 와닿는 문장은 무엇이었을지 적는다 그랬다. 며칠 적어 본 것들 중에는 나와 함께한 문장도 있었다.
"지금 하는 일 너무너무 힘들다. 운명처럼 행복하기만 한 일이 생겼으면."
내가 한 줄도 몰랐던 말이었는데 메시지 검색해 보니 진짜 한 말이었다. 마법처럼 오늘과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아란의 오늘의 문장은 무엇이 될까.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나는 아란이 적었던 내 문장이 오늘의 문장이 되었다. 운명처럼 행복하기만 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