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7일 화요일, 빛과 설탕
어제 먹었던 유부초밥의 맛이 잠들기 전부터 일어날 때까지 떠올랐다. 아침 일과를 마친 뒤 두부유부초밥을 만들어 먹어야겠다 다짐하고 장 봐 놓았던 유부에 두부를 으깨 넣었다. 가지덮밥을 만들 때에는 간장을 너무 많이 넣어서 문제더니, 두부유부초밥은 두부 물기를 제대로 빼지 않아서 문제였다. 모든 액체류가 자꾸 선을 넘는다. 이건 내 사주 오행이 수인데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에 왔으니 어쩔 수가 없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도 맛있는 원재료가 힘을 내 주어 먹을 만한 맛이었다.
오늘은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서 아란이 가고 싶었던 카페를 간 뒤 아란은 오마카세를 먹으러, 나는 오일장을 보러 갈 셈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카페가 먼 곳에 있어 오일장 시간과 맞추기 어려워졌다. 고민하다 오일장을 닷새 뒤에 보러 가겠다 말했다. 오일장이야 다음에도 보러 갈 수 있는 것이지만, 아란과의 카페행은 오늘만 갈 수 있는 것일 테니. 이런 식의 결정 방식은 종종 내 결단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
입도한 뒤 처음 만난 맑은 날이었다. 버스 차창 사이로 비친 빛이 내 발목을 차랑차랑 스쳤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들이 무리 지어 다녔다. 꼭 새 떼들처럼. 뒷자리에 앉아 버스가 더 덜컹거렸다. 덜컹거림이 멎은 뒤에도 몸을 좌우로 흔들거렸다. 신이 난 몸짓이었다. 아란은 가자미눈을 하고 입은 웃었다.
빛이 예쁜 날과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얇게 난 창문은 예쁜 빛을 한데 모아 창 아래에 있는 것들에게 선물해 주었다. 냉침 차에 반사된 빛이 아름다웠다. 달콤한 라벤더 향기는 레몬버베나 위에서 단맛을 냈다. 향기를 잔뜩 머금었다. 이름에 걸맞게 고요한 음악이 흘렀다. 전시장 같았고, 손님들이 전시의 주체 같았다. 작은 창 맨 끝에는 윤슬이 반짝거렸다. 아란은 저녁을 먹으러, 나는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설탕 깨 부순 것 같은 바다. 5월의 제주에서는 드라이브 중에만 만날 수 있었던 그 설탕 바다가 내 눈앞에 있었다. 반짝거리는 것들을 가까이 보고 싶어서 가까이 가면 가까이에서 반짝거려 주었고, 멀리서 보려 뒤로 가면 가까이 와서 반짝거려 주었다. 유독 까맣던 모래 위에 자리한 물결은 부드러운 섬유 같았고, 얕은 곳에서 물결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멀리서 찍은 역광 사진에 서퍼들이 찍혀 <설탕 위에서 서핑을>이라 이름 지었다. 해가 저물수록 은빛 물결은 점점 커졌다. 휩쓸고 지나간 자리도 은빛이었다.
마음속에 설탕을 한 바가지 밀어 넣고 Lamp의 음악을 들으며 귀가했다. 운동을 마친 뒤 논알코올 맥주, 바질두부파스타와 함께 <카레의 노래>를 보다 잠들었다. 오롯이 빛이 만든 설탕이 선사해 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