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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Aug 19. 2021

제주 한 달 살이 (5)

2021년 8월 18일 수요일, 낮 산과 저녁 바다

  매일을 소중히 여기며 살기 때문일까, 이곳이 제주이기 때문일까. 바깥 날씨가 좋으면 집에 있기 아쉬워진다. 며칠 내내 비가 그렇게 내리더니 오늘도 맑았다. 근처 오름을 올라 봐야겠다 다짐하고 어디가 제일 가까운지 검색했다. 한라수목원 옆의 광이오름이 떴다. 슬리브리스에 카디건을 걸치고, 편의점에서 급히 선스틱을 구입한 뒤 버스에 올랐다. 햇살이 뜨거웠다.


광이오름 오르는 길


  오름에 오른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이라는 말은 내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늘 나를 들뜨게 만든다. 나의 첫 오름은 수목이 우거진 한적한 곳이었고, 길게 난 길이 예뻤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흙냄새가 새어 나왔다. 양 옆은 숲이 감싸 주었기 때문에 앞뒤만 보아도 되었고, 앞이든 뒤든 아무도 없었다. 나와 숲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크게 들렸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노란색 나비가 팔랑거렸다. 나무에 가려진 하늘은 소박해 보였다. 초록빛 그늘이 시원했다. 정상 정자에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고, 조용한 시간들을 보낸 뒤 내려가고 있었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수월하지만 오늘은 오를 때만큼 천천히 내려가고 싶어서 숲을 빙 둘러 내려갔다.


광이오름 정상


  낮은 오름이어서 뒷산 오르듯 금방 다녀올 수 있었다. 한참을 숲속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여전히 낮이었다. 땀을 씻어 내고 짧은 드라마 몇 편을 봤다. 점점 해가 떨어지려 했다. 헬스장에 출석하기보다는 자연 속에 더 있고 싶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보러 갈 수 있었다. 곧 마음을 먹었다. 이호테우로 향했다. 평소보다 두세 배는 커 보이는 해가 차창 너머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해에 가려진 분홍빛 하늘을 보았다. 귓가에 흐르던 음악이 잘 어울렸다.


이호테우 가는 길


  산이 생각을 덜어 주는 곳이라면 바다는 생각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모래사장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수신인 입력하지 않은 편지를 썼다. 우리는 무엇이 될까첫 줄이었고, 우리는 무엇이 되어도 괜찮을 거야. 마지막 줄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든, 관계하는 그 누구의 모습이든, 그게 무엇이 됐든.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까. 무엇이든 좋을 거야. 다 괜찮을 거야. 그런 마음이었다. 어제 봤던 은빛 물결은 시원하고 화려했는데 오늘 보는 금빛 물결은 꼭 나를 다독이는 것 같아서. 우리가 파도 앞에 앉는다면, 바닷물이 한 번도 닿아 본 적 없는 곳에 앉아도 좋을 거고, 한 번은 닿아 본 곳에 앉아도 좋을 거라고. 파도가 우리를 집어삼킨다면, 입속에 모래가 들어와도 웃어 버리자고. 누군가와 함께 왔다면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이호테우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나는 목표와 수단이 바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인 듯했다. 오랜 고민이었던 나의 내적 동기와 성장 욕구에 대한 고민을 바로 세우고, 옷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아직도 고민에 대한 답을 못 내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고민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아직 남은 시간이 많으니까. 서울에 되돌아가더라도. 열심히 고민하는 사람은 언제나 고민할 시간이 많다.


  귀가 전 아란의 집 앞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나는 고구마 소츄 한 잔을, 아란은 진저 하이볼 두 잔을 마셨다. 아란은 오늘 이름 모를 누군가가 했던 '매일매일 행복하세요'에서 행복을 찾았다 그랬다.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행복을 빌어 주어서. 매 순간의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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