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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Aug 21. 2021

제주 한 달 살이 (6)

2021년 8월 19일 목요일, 함께한 사람들

  뚜렷한 계획을 세워 놓지 않은 날이었다. 발길 이는 대로 움직였다. 배고프지 않을 때는 먹지 않았고, 출출해졌을 때는 며칠 전에 사 먹었던 연잎밥이 생각나서 같은 음식을 주문해 먹었고, 책이 읽고 싶어져서 독립 서점에 갔다. 가는 길에 주고받은 메시지가 귀여웠다. 생각이 너무 많은 습관 탓에 머리 터질 것 같다는 친구에게 그 습관 덕에 반짝반짝해 보인다고 그랬다. 칭찬 많이 먹고살라고 했더니 '냠냠'이라 답장 왔다. 책방에서 생각나는 구절이 있으면 찍어 보내겠다 답장하고 바지 주머니에 휴대 전화를 쑤셔 넣었다. 곧 도착한 이후북스 제주점은 소담한 공간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 책을 구입했다.


김현경, <여름밤, 비 냄새>

아란이 생각났다. 음악과 영화에서 착안한 생각들이 아란이 좋아할 법한 예쁜 말들로 적혀 있었다. 일상 속에서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찾아 가사를 쓰는 아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안윤, <물의 기록>

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에게 필요한 책일 것 같았다. 아란에게 선물할 책과 같은 곳에서 펴낸 책이었다. 작가 소개가 마음에 들었고, 담담한 시선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자주 바라봅니다.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갑니다.


엄지혜, <태도의 말들: 사소한 것이 언제나 더 중요하다>

귀여운 메시지의 주인공이 생각나는 문장이 보였다. 태도를 중시하느라 가끔은 스트레스받기도 하는 나와 같은 마음의 사람이 쓴 글 같았다.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선호를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 뭐든지 좋은 사람보다는 상대를 적절히 배려하며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 좋다. 인터뷰하다 화색이 도는 순간이 있다. 상대가 편견 없이 질문을 듣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멋있는 대답보다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을 때다.


  정아와 범준을 만날 때 주고 싶은 귀여운 스티커 두 장과 바다를 담은 엽서집을 함께 구매한 뒤, 승우 추천의 빈티지 숍 <에브리바디 빈티지>에 갔다. 나만 알겠다고 꽁꽁 숨겨 두지 않는 마음, 내가 가 보고 싶으니 네가 가 봐, 혹은 내가 가 봤는데 너무 좋았어서 너도 가 봤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은 더없이 소중하다. 고맙게도 제주에는 내가 대신 가 볼 수 있는 곳들이 많았다.


에브리바디 빈티지 입구


  이것저것 담다 보니 과소비했다. 과소비는 여행자들의 특징인 걸까. 계산할 때 사장님께서는 "여행 오셨어요?"라 물었고, 나는 "티 나요?", 사장님은 "아뇨. 너무 자연스러우세요." 했다. 나는 사장님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았다. 푸하하 웃었다. 한 달 살이를 응원한다며 귀여운 키링 두 개를 넣어 주셨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에 '또 올게요'로 답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저녁에 정원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만나기 전에 운동을 하고 싶었다. 운동하고 가겠다 했더니 정원도 등을 조지고 오겠다 그랬다. 나는 그럼 우리 둘 다 등 조질 날이니까 약속 시간 오버돼도 서로 이해하겠네? 했고, 정원은 당연히 오버될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킥킥댔고, 당연스럽게 삼십 분을 미뤄 일곱 시 반에 만났다.


  오 년 만의 만남이었다. 정원이 스물다섯, 내가 스물하나일 때 만났었는데, 이제는 내가 정원의 나이를 넘어 스물여섯이 되었다. 정원이 기억하는 나는 뚜렷한 형상은 아니었지만 어렸고, 지금과 다른 점이 많았다. 정원은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정원은 자신이 늙었다 그랬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늙은 티 하나도 안 난다 그랬더니 화장발이라던가. 늙은 사람이고 싶은 것 같길래 웃고 넘겼다. 어차피 내 눈에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취향이 뚜렷했고, 재미있는 일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녀 취미가 많았다.


도어스


  정원이 기억하는 우리의 만남 중 한 번은 내가 정원을 우리 집 쪽까지 호출했는데, 이유인즉슨 단순히 집 근처에 치킨 맛집이 있기 때문이었고, 그 치킨집은 특별한 치킨집도 아닌 그저 프랜차이즈 치킨집이었다. 대체 한 시간도 넘는 거리를 왜 온 거냐고 물었더니 그러게? 라 그랬다. 그날도 정원은 종일 서귀포에 있다가 나를 제주시에서 만났고, 다음 날 출도할 여정이었으면서 숙소를 우리 집 근처로 잡았다. 같이 탄 택시 안에서 숙소 위치는 어떻게 정하게 된 것이냐 물으니 아무렇지 않은 듯이 "네가 이 동네 산다면서?" 했다. 하여튼 그대로인 사람이 맞았다.


  함께하고 있지 않아도 생각한 사람들, 추억의 한 부분을 함께한 사람들 덕에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피곤하지 않았다. 잡념 들 시간 없이 까무룩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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