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0일 금요일, 아란의 우도
날이 맑개 갠다면 아란과 우도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우리의 염원을 들은 듯 해가 쨍쨍했다. 약속 시간은 아홉 시 반이었고, 삼십 분 간격으로 오는 버스는 아홉 시 사십 분 출발 예정이었는데, 하필이면 매우 느긋한 기사님의 택시를 타게 됐다. 아란이 절대 늦지 말라고 그랬는데. 평소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던 아란인 터라 마음이 더 조급했다. 출발 2분 남기고 버스 정류장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숨을 고르며 인사했다.
"나 완전 뛰어 왔어."
"으응, 당연히 뛰어 와야지."
그때부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했어야 했나. 기분 나빴으려나. 얼마나 친한 친구이든 그 사람의 감정을 자꾸 읽고 있는 나는 곧잘 긴장한다. 일 초 만에 긴장 상태로 돌입해서 급격히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같이 버스 타서 다행이라는 눈치 섞인 내 말에 아란은 내가 늦었으면 다음 버스 타고 오라 했을 거라고 답했다. 장난 섞인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쭈굴거렸다. 창밖 풍경은 내 마음도 모르고 아름다웠고, 아란은 창 앞에 카메라를 가져다 대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아무렇지 않게 몇 마디 주고받았다. 저기 우리 가려던 거기잖아, 하는 말에 어, 그르게, 하고. 어찌 됐든 버스 시간에는 늦지 않았으니 그렇게 기분 상할 일은 아니었을까. 그런가 보다. 그럴 거야. 약간은 안심했고 여전히 피핍했다. 온전하지는 못한 정신으로 메모장을 열어 창밖 풍경을 보이는 대로 끄적였다. 빛 받은 숲은 노랗게 물들고, 그늘진 숲은 파랗게 물든다고.
배를 타고 우도에 도착했다. 우리는 총 세 곳을 가기로 했다. 서빈백사, 밤수지맨드라미, 그리고 검멀레. 버스로 이동했고 다양한 기사님을 만났다. 재미있는 기사님, 젠틀한 기사님, 스트레스 많이 받으신 것 같은 기사님. 나 못지않게 사람 눈치를 보는 아란은 기사님의 기분에 따라 눈을 굴렸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기사님 분위기가 아까 버스랑은 되게 많이 다르다. 그르게. 조용히 동조만 하는 나였다.
백사장은 처음이었다. 서빈백사는 흰모래와 맑은 낮 덕분에 가장 밝은 바다로 빛났다. 햇빛은 물빛을 옅은 노란색으로 비췄고, 둥둥 떠다니는 미역은 선명한 초록빛을 냈다. 초록색 반팔 니트에 연노랑 치마를 입은 아란과 잘 어울리는 바다였다. 느낀 그대로 전했다. 아란은 "그래애?" 하면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발가락에 붙는 미역을 빤히 쳐다봤다. 바닷물에 발을 넣는 일은 아란이 잘 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날은 웬일인지 넣어 보고 싶었다 그랬다. 내가 아란과 잘 어울린다 했던 바다였고, 아란이 안 하던 일을 하게 되는 바다였다.
밤수지맨드라미는 나의 유일한 제주도 출신 친구 은지가 추천해 준 책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정거장 근처에 있는 곳이었다. 책 가짓수가 많았음에도 서가 뒤 앉을 수 있는 공간 때문인지 좁게 느껴지지 않았고, 은은한 조명과 더불어 사소한 곳 하나하나까지 사장님의 센스가 돋보였다. 내가 가 본 모든 책방 중 가장 예뻤다. 그 순간만큼은 이곳에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아란은 매대 위에서 내 이름과 같은 작가님의 유기농 밥상 요리책을 발견하곤 채윤, 하고 불렀다. 발품 팔아 알게 된 농부님들의 농작물 정보와 연락처, 그리고 주고받았던 메시지까지 첨부되어 있던 책이었다. 몰랐던 세계를 하나 더 알게 된 기분이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멋진 사람의 책 한 묶음, 그리고 옆에 놓여 있던 초보 비건의 책 한 권, 아란에게 적어 줄 엽서 한 장과 모든 그림들에 이유가 있던 엽서집까지 바리바리 챙긴 뒤 결제했다. 찍어 주시는 도장이 예뻐서 아란에게 자랑했다. 아란은 내가 책을 고를 동안 잠시 바다를 보고 다시 돌아왔고, 우리는 차 한 잔과 커피 한 잔을 시켰다. 가만히 앉아 있다 한쪽에 놓인 방명록을 발견했다. '아란'이 세 번이나 들어가는 짧은 글을 적어 낸 뒤 아란에게 전달했고, 아란은 웃으면서 쓰고 싶은 말을 썼다.
검멀레 해수욕장은 아란이 가장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우도에 오기 전부터 검멀레 이야기를 꺼냈었고, 나는 어느 곳인지도 알아보지 않은 채 아란이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가자 그랬다. 우리는 검멀레로 갈 버스를 기다렸다. 언제 도착할지 몰라 해 피할 겨를도 없이 땡볕 아래에서 십 분을 서 있었다. 기다리던 중에 아란이 내 뒤편 하늘을 가리켰다. 구름이 너무 예뻐. 말도 안 되게 예쁜 구름이야. 채윤은 구름 좋아해? 나는 구름 엄청 좋아한다? 반대편으로 뛰어가 연신 "너무 예쁘다" 외치면서 구름 사진을 찍었다. 찍는 사이에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아! 버스!" 하면서 방방 뛰었고, 얼른 다시 돌아오라는 내 손짓에 방긋 웃으면서 다시 달려왔다.
검멀레는 맑고 잔잔했던 서빈백사와는 달리 웅장했다. 계단 몇 개를 올랐다. 높은 곳에서 바다를 보는 일이 얼마만이었더라. 넓은 하늘 아래에 있는 바다는 파랬고, 녹색 절벽 아래에 있는 바다는 검은빛이 섞인 초록빛이었다. 절벽 아래의 바다는 유독 반짝거렸다. 눈이 시릴 만큼 큰 반짝임이었다. 아란은 검은색 절벽 덕에 윤슬이 더 반짝일 수 있는 것 같다 그랬다. 정말 그렇게 보였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 보려 한들 눈에 담기는 것만큼 담기지 않았다. 우리 눈과 마음속에만 담았다.
우도 한 바퀴를 돌았더니 하루가 다 갔다. 긴 여정에 몸이 피곤했지만 정해져 있던 계획대로 이호테우 근처 LP바에 갔다. 나는 분다버그를, 아란은 이번에도 하이볼을 시켰고, 내가 아란에게 어떤 하이볼이 제일 좋은지 물으면 아란은 진저 하이볼이 제일 좋다 말하면서 방문했던 하이볼 전문 펍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줬다. 아란은 언제나 내가 묻는 '가장 좋은 것'에 대한 답변이 뚜렷했고, 답변으로부터 대화를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쯤 잔을 비웠을 때에 또 물었다. 오늘 언제가 제일 좋았어? 아란은 내 머리 위로 예쁜 구름이 떠서 그걸 찍으러 뛰어갔을 때라 답했다. 구름만 있을 줄 알았던 사진에는 내가 함께 찍혀 있었다.
씻고 나와 아란의 집에서 예능을 함께 보는 것까지가 마지막 여정이었지만, 내 컨디션 탓에 그것까지는 함께하지 못했다. 뻗어 있던 사이 유정에게서 선물과 엽서를 잘 받았다는 전화가 왔다. 엽서 귀퉁이에 향수를 뿌렸다가 글자가 다 번졌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보냈는데, 유정은 그게 웃겨서 또 웃었다 그랬다. 뭐가 됐든 유정이 웃었다니 다행이었다. 유정은 웬일인지 좀처럼 하지 않던 이야기를 하길래 네게 이런 이야기 듣는 것 처음인 것 같다고 그랬더니, 어디에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답답해 죽겠어서 털어놓고 싶었다 그랬다. 털어놓고 나니까 좀 나은 것 같냐고 물었다. 유정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정도로 싱겁게 답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긴 통화를 했다.
내 기운을 많이 준 날이었다. 오늘의 우도는 아란의 것, 밤의 통화는 유정의 것으로 주었다. 작은 행복에라도 가담했다면 됐다. 조금이라도 내가 있어 나아졌다면. 그럼 다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