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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Aug 23. 2021

제주 한 달 살이 (9)

2021년 8월 22일 일요일, 오일장

  제주도에 온다면  하리라 다짐했던   하나가 오일장을 보는 일이었다. 17일에 보려던 장을   냉장고에  먹을 식재료가 동나 오늘만을 아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오일장이 열기 한참 전부터  먹고 싶은 음식들을 적어 놨다. 우선  번이나  먹었던 연잎밥의 감동이 가시질 않아 기필코 찰현미를 사겠노라 다짐했고, 내가 사랑하는 무화과를 사고 싶었고, 비건 유튜버가 맛있게 먹던 빙떡이 너무너무 궁금했다.   가지만 산다 해도 반은 성공이었다. 추가로 고등학교 시절 최애 반찬이었던 두부쑥갓무침을 하고 싶어서 쑥갓이 있다면 쑥갓을 사고 싶었고, 각종 무침 반찬류를 위한 참기름도 기름집에서 사면 좋을  같았다.


제주시민속오일시장 가는 길


  열한  즈음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발을  적실 만큼 비가 쏟아졌다. 빗길이 미끄러워 조심조심 걸었다.  빗속에도 오일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 따로 지도 앱을 찾아볼 필요 없이 앞사람을 따라 걸었더니 금방 시장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쌀가게가 보여 찰현미를 샀다. 참깨도 달라 했더니 얼마나 필요하냐 물어보셨고, 나는 ", 많이는 필요하지 않고요...." 정도로 얼버무렸는데,  같은 사람이 익숙하셨는지 볶아 놓은 깨가 따로 있다고 소분한 봉지를 건네주셨다. 내가 모르는   많았다.


제주시민속오일시장


  사실 혼자 시장에서 장을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내 마지막 시장의 기억은 짧은 여행을 갔을 때 요깃거리나 선물을 사기 위해 간 시장이었고, 장을 본 기억은 초등학생 때 엄마 따라 동네 시장에 간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장 보는 일이 그다지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얼마큼 사고 싶다 말하는 것도 제법 고민스러운 일이었고, 분명 엄청 넓은 것 같은데 나는 이상하게 같은 곳만 빙빙 돌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와 복작거리는 사람들, 나의 끝내주는 길치 성정이 만들어 낸 환상적인 하모니였다. 나는 무화과를 찾고 싶은데 이상하게 계속 채소 가게만 돌고 있었고, 그럼 쑥갓이라도 찾아보자 싶었는데 그 어느 풀들에도 이게 어느 풀인지, 얼마인지 쓰여 있지가 않아서 퍽 난감했다. 마켓컬리 헤비 유저에게 오프라인 장보기는 어드벤처였다.


  그러면 좀 물어물어 찾으면 좋을 텐데 가끔 이상한 고집이 발동해서 그냥 입 꾹 닫고 빙빙 돌 때가 있다. (이 이상한 고집은 우리 아빠에게서부터 온 것이다. 아빠는 길 모를 때 좀 물어보며 가라 해도 절대 안 묻고 혼자 찾으려 한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았는데 왜 내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거지?) 꿋꿋한 고집으로 후각을 동원하여 돌다 보니 기름집을 찾았다. 가장 작은 용량의 참기름을 여쭈었더니 한라산 소주병에 담긴 기름을 주셨다. 기름집을 찾으니 갑자기 내가 원했던 모든 것들이 근처에 있었다. 빙떡도, 두부도, 무화과도 있었다. 무화과 맛있는 줄 어떻게 알고 왔느냐 묻기에 "무화과를 좋아해서요" 했는데, "그래서 아가씨가 이렇게 예쁜가?" 하셨다. 아란이 택시비를 낼 때 "육천만 원입니다" 하셨다던 기사님이 생각나는 멘트였다. 아하하 하고 웃어넘겼다.


  아란이 부탁한   봉지를 구입하면서  옆에 있던 손가락  마디 크기의 작은 애플망고를 시식했는데  돌아갈 만큼 맛있었다. 게다가 "제주도에서만" "특정 시기에 가끔씩" 나오는 과일이라니   수가 없었다. 계획에 없던 미니 애플망고까지  보따리  들고 택시를 기다렸다. 무거운 짐과  탓에 기다리는 내내 땀이 줄줄 흘렀다. 버스 기다리는 것만큼 택시를 오래 기다렸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항상   있던 우리  냉장고가 떠올랐다.   나갈   두어야 하기 때문에  놓는 것들, 그때는 먹고 싶었고 나중에도 먹을  같았던 것들을 사다 보면 냉장고는   수밖에 없었다.


오일장에서 사 온 무화과, 미니 애플망고


    참기름을 팬에 두르고 빙떡을 앞뒤로 구워 먹었다. 메밀전병 안에 삶은 무채밖에 없는 이게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싶었다. 고소한 참기름 옷을 입히니 따로 장을 찍어 먹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었다. 간단히 요기한  출도 전의 아란을 우리 집으로 불러 핸드드립을 내려 주고, 미니 애플망고와 무화과를 먹였다. 사실은 육지로 돌아가지 말라고 꼬셔  것이었는데  쉽지 않았다. 아란은 12 제주   살이를 계획 중이니 나도 12월에 오라고, 제발이라고 그랬다. 잠시 아란과 제주도에서 함께 보낼 크리스마스를 상상하면서 썼던 엽서와 선물로 주고 싶었던 , 내가   동안 펴낸 짧은 에세이집을 주었다. 아란도 나에게 편지를 주었다.  장만   알았더니 오늘 아침에도    썼다며  장을  줬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생각나서    썼다는 마음이 찡했다. 그렇게 아란을 보냈다.


아란의 편지


  자기 전 읽은 책에서 마음을 울린 구절이 있었다.

"살아가면서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편지는 분노와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다."

오일장을 보고 글을 쓰는 일, 제주에서의 한 달을 매일 기록하는 일 모두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쓰자고, 그리고 아란과 유정에게 엽서를 썼던 일처럼 사랑하는 일을 계속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사랑하고자 했을 때, 오늘 아란에게 받은 두 장의 편지처럼 나는 또 두 번씩 사랑받을지도 모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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