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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Aug 24. 2021

제주 한 달 살이 (10)

2021년 8월 23일 월요일, 비건 집밥

  어제 장도 봤겠다, 오늘부터 밥을 해 먹을 요량이었다. 사 온 찰현미로 고두밥을 지어서 냉장고에 있는 버섯을 잔뜩 넣은 다음 버섯커리를 해 먹고 싶었다. 남은 가지와 애호박도 큼직하게 썰어 올리면 아주 맛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고 돌린 뒤 근처 마트에 카레 분말을 찾으러 갔고, 난관에 봉착했다. 동물성 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카레가 없다.


  비건 유튜버들이 카레는 또 곧잘 해 먹기에 웬만한 시판 카레는 전부 비건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성분표를 확인해 보니 돼지고기, 쇠고기, 조개류가 함유되어 있었다. 원재료명에는 관련 재료가 적혀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대체 저것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무슨무슨 맛 양념, 어쩌고 맛 분말에 들어가는 것일까. 제법 큰 중형마트였음에도 동물성 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카레가 없었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서 성분표를 살피느라 무릎이 다 아팠다. 그나마 가장 나았던 대안이었던 우유만 함유된 카레를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꼭 먹고 싶은데 유제품까지만 허용할까. 한 번만 그렇게 먹을까.


  오래 고민했지만 타협하지 않았다. 이번 한 번을 허용한다면 앞으로의 허용 범위가 자꾸만 늘어날 것 같았고, 젖을 착취당하는 소가 떠올랐고, 젖소라는 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를 강제로 임신시켜 젖을 짠다는 것이 떠올랐고, 카레가 아니어도 아직 해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음을 떠올렸다. 처음 지은 밥은 밥 자체의 맛을 즐겨 봐야지. 어딘가는 채식 카레를 팔겠지. 정 안 된다면 카레는 비건 식당에 가서 사 먹을 수도 있으니까 타협하지 말자.


  집에 돌아와 채식 카레를 파는 곳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비건 식당을 찾아다니던 유튜버가 채식 만두를 구입했던 장면이 떠올라서 그 장면을 다시 봤다. 유튜버가 갔던 곳은 '자연드림' 매장이었고, 나는 자연드림의 존재 자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친환경 유기농품만을 판매하는 매장이었다. 이런 곳이 다 있구나 감탄하며 판매 제품 중 채식 카레가 있을까 살폈으나 그것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자연드림을 통해 다른 유기농품 판매점인 '한살림'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는 채식 카레가 있었다. 숙소와 가까운 곳에 매장도 있었다. 우선은 배가 고프니 있는 재료로 밥을 해 먹고 한살림에 카레를 사러 가기로 계획했다.


  가장 먼저 냄비에 물을 올렸다. 자기 전 불려 놓았던 찰현미를 쏟아부었다. 꼬들한 밥알이 주목적이었기에 현미 위로 1-2cm 정도 올라올 정도로만 물을 부었다. 강불로 올리고, 곁들여 먹고 싶었던 두부깻잎무침을 하기 위해 오일장에서 사 온 모두부 반 모를 손으로 으깼다. 다진 마늘 약간과 간장 한 스푼, 소금 약간, 참기름과 통깨로 양념을 하고, 깻잎을 살짝 데쳐 쫑쫑 썰어 넣었다. 한 번 데치고 나니 깻잎 양이 한 줌으로 줄어서 비중이 미미해졌지만 두부 자체로 이미 훌륭해서 꽤 괜찮은 반찬이 됐다. 만족하며 그릇에 조금 담고, 남은 것은 밀폐 용기에 옮겨 담았다.



  밥을 중불로, 중불에서 약불로 줄이면서 남은 두부를 부침용으로 두껍게 썰고, 팬에 참기름을 두른 뒤 구웠다. 집에 남은 미니 새송이버섯과 양송이도 함께 볶았다. 그 사이에 밥이 다 되어 그릇에 밥과 반찬들을 옮겨 담았다. 남은 채소에 드레싱을 부어 곁들였다. 설거지는 쌓였지만 편안하고 든든한 식사였다. 집을 깨끗하게 치운 뒤 한살림에서 채식 카레 쇼핑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저녁에는 남은 무화과에 아가베 시럽을 뿌리고 견과류 한 봉지를 털어 넣어 퍼먹었다. 먹으면서 내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부터 해야 할 고민이었기에 지체하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나는 나의 목표와 수단을 바로잡고 싶었고, 내가 그동안 노력하지 않으면서 살았던 것들을 바로 세우고 싶었고, 해 볼 수 있는 노력들을 더 찾고 싶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민이 가중됐다. 주어진 삶에 안주하면서 노력하지 않았던 것들을 적고 나니 내가 노력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노력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질문은 곧 목표가 없었다는 이유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내가 노력해 볼 수 있을 시도들을 적어 보니 그건 또 이미 이삼 년 전부터 공통적으로 들어왔던 피드백에 대한 시도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정체되어 있고 그대로인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자괴감이 들었다.



  편한 음식들로 속이라도 편해서 다행이다. 이번 주는 태풍이라니 계속해서 이 고민들을 이어갈 것이다. 고민할 일을 정해 놓고 아침에 일어난다는 것. 지금까지는 다소 압박적이고 피곤하게 느껴진다.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일까. 일단 카레를 해 먹으면서 생각해 봐야겠다. 그럼 조금 더 기운이 나겠지. 나를 위한 음식을 해 먹는 일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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