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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Aug 26. 2021

제주 한 달 살이 (12)

2021년 8월 25일 수요일, 애월과 엽서 두 장

  제주 살이 12일 차, 매일의 하루가 날씨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비가 덜 왔고 흐렸다. 흐린 바다가 보고 싶은 날이었다. 어제 먹고 남은 맹숭맹숭 꾸덕 카레를 꾸역꾸역 욱여넣고 나갈 채비를 했다. 혼자 만들어 먹는 일은 만드는 것도 먹어 치우는 것도 참 고된 일이다.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었다면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먹었을 수 있겠지만 내가 혼자 만들어 먹는 것이니 어떻게든 입에 넣어 해치워야 할 것 같다. 제로 웨이스트 실천해야 하지 않겠어요.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십오 분 정도 걸었다. 걷는 동안 애월 바다가 보였다. 애월. 발음도 참 예쁘게 난다. 확실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데도 애월에는 애착이 간다. 생각만 해도 어쩐지 편안해진다. 애월이라는 이름이 좋아서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기억들이 많아서 좋은 것 같기도 하고.


  항상 둘이서 오던 애월이어서 홀로 애월 바다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제주에 여행을 올 때마다 여행 일정의 반 이상은 흐린 날이었기에 흐린 날의 애월 바다도 자주 봤었는데, 오늘의 애월은 흐린 것을 넘어 슬퍼 보였다. 부산 흰여울마을에서 봤던 바다는 꼭 펑펑 우는 사람을 닮았었는데, 오늘의 애월 바다는 울음을 꾹 참는 사람을 닮은 것 같았다.


흐린 날의 애월 바다


  도착한 카페는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한 곳이었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바다가 작게라도 보였고, 그 조그맣게 보이는 바다가 예뻤고, 한쪽 벽에 쌓인 돌담도 예뻤다. 나는 작은 베란다 바로 옆 자리에 앉았고, 그곳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고양이는 풀숲에 숨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면서 따르고, 어떤 사람은 무서워하고 줄행랑쳤다. 바람이 불면 의자 밑에 웅크렸고, 해가 나면 풀숲으로 들어가서 귀만 내밀었다. 날씨에 따라 하루를 결정하는 나의 모습과 편하고 불편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 사는 것과 고양이 사는 것 별반 다를 바 없는 걸까. 일단 사람 쪽이 덜 귀엽긴 한 것 같지만.


슬로보트


  고양이를 한참 보며 고민해야 할 일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은 언제나 더 큰 고민으로 이어지고 나는 항상 부족한 점이 많다. 원인의 근원을 찾기 위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나는 무엇이 변화되어야 할까? 나는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을까? 변화해야 할 것만 같은 것들과 변화하고 싶은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변화시키고 싶은 것을 변화시킨다면 더 나은 내가 될까? 과연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을까? 해 보기도 전에 고민만 많은 걸까? 뭐라도 시작해 봐야 하는 걸까? 대체 나는 왜 스스로 변화시키고 싶은 부분들이 누가 말해 준 것이 아닌 이상 잘 떠오르지 않는 걸까? 대체 왜?


  물음표만 오만 개 쓰고 명확한 다음 스텝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고민한 것만으로도 더 나아질 준비를 한 것 같았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렀다.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차분한 곡.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유리가 떠올랐다. 유리와 나는 늘 이야기를 꺼내고 확장함에 고민이 없다. 그래서 유리가 내 앞에 있었다면 이거 내가 좋아하는 곡인데,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유리는 그걸 듣고 더 좋은 이야기를 해 줬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자꾸만 유리 생각이 났다. 자리를 고쳐 잡고 앉아 유리에게 엽서를 썼다.


유리에게 쓴 엽서


  한 달 동안 제주를 살면서 꼭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유리에게 단숨에 엽서를 적어 내고 나니 또 다른 소중한 사람이 떠올랐고, 한 장의 엽서를 또 금방 채워 적었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동근이 수신인이었다. 동근은 사월에 내가 힘들어할 때에 바로 내게 전화해 주었었다. 나는 그때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위로를 받고 더 나아지고 싶었는데 그만큼의 힘이 되어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어디 내놓아도 걱정 안 될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이 힘들어할 때는 더욱 마음이 쓰인다. 적다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얼른 꾹 삼켰다. 눈물 꾹 삼킨 애월 바다를 보면서.


  근처 소품샵에서 유리와 동근에게 줄 선물들을 구매했다. 유리에게는 하바리움을, 동근에게는 캔들 홀더를. 유리라면 생명력 속 움트는 사랑을 느껴 줄 것 같아서였고, 동근이 어디 멀리 가서 불멍을 하지 않더라도 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평온해지길 바라서. 그러한 이유들로 선물을 구매했다고 쓴 <선물 설명서>를 선물에 함께 붙여 주었다.


동근에게 붙여 준 선물 설명서


  내일은 선물을 부치고 나를 또 고민할 것이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고 싶은 고민들을 하며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주에 온 목적을 빽빽하게 채워 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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