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윤 Aug 27. 2021

제주 한 달 살이 (13)

2021년 8월 26일 목요일, 목소리의 크기

  오랜만에 운동을 오전에 다 끝내고 맑은 날에 맞추어 시내로 나왔다. 채식을 시작하면서 하나 둘 먹어 보던 식재료 중 항상 맛있게 먹던 음식이 있다. 병아리콩을 갈고 향신료로 맛을 내 튀긴 병아리콩 고로케, 팔라펠이다. 서울에서는 떨어질 때마다 마켓컬리로 쟁여 놓던 아이템이었다. 그만큼 좋아하는 팔라펠이 먹고 싶은 날이었다. 마침 비건 지도에 수록된 아랍 음식점이 있었다. 동문수산시장 근처의 와르다 레스토랑을 찾았다.


와르다 레스토랑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국적이고 더 아기자기한 공간이었다. 제주 속에 작은 중동이 있었다. 창밖으로 커플 한 팀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여자는 행복하게 웃으면서 빵을 뜯고 있었다. 저 찐웃음은 맛없는 음식이라면 나올 수 없는 미소라 생각하면서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공복으로 운동을 마치고 온 것이라 나는 배가 매우 고팠고, 들어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나서 더 배가 고팠다. 처음 오는 곳인데 정겨운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맞아 주신 사장님 덕분일까. 자리에 앉자 금방 메뉴판을 건네주셨다.


  “저희 주방 직원이 지금 없어서요….”

  “아…? 그럼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제가… 해 볼 수 있는 거라면 해 볼게요…!”


  사장님이 아니라 직원 분이셨던 걸까. 그녀가 ‘해 볼 수 있는 음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 주시겠다는 마음이 좋았다. 알 수 없는 의지가 느껴져서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잘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하는 의지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그 의지 때문인지 “그래서 지금 되는 게 어떤 게 있을까요?”라 질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그저 찬찬히 메뉴판을 살폈다. 나는 비건 옵션이 가능한 음식을 여쭈었고, 말씀 주신 메뉴들 중 <팔라펠과 호브스>를 시켰다.


  “아, 제가 할 수 있는 거네요!”

  “아아, 다행이에요.”


  안도한 듯한 목소리에 웃음 짓게 됐다. 서로 다행이라며 웃었다. 식전에 렌틸콩 수프를 먼저 주셨고, 수프에서는 후추 맛이 칼칼하게 느껴졌다. 속을 데우니 음식이 나왔다.


와르다 레스토랑의 팔라펠과 호브스


  쫀득한 빵피 위에 팔라펠을 뭉갠 뒤, 다진 채소와 후무스를 올리고 소스를 찍어 먹었다. 팔라펠을 으깨 먹었을 때에는 팔라펠 향신료 맛이 강하게 느껴졌고, 팔라펠 없이 채소만 올려 소스에 찍어 먹었을 때에는 고수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을 때마다 호브스의 쫀득함이 배로 느껴졌다. 빵도, 채소도, 후무스도 싹싹 비웠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더 방문해야겠다 생각하며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번 주에 방문했던 빈티지 숍이 바로 옆에 있어서 잠시 들렀다. 저번 주와 크게 다른 매물(?)은 없는 듯했다. 조용히 혼자 구경하고 있었는데 여러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대화 내용이 자꾸 들렸다. “누구누구 데리고 왔으면 좋았겠다. 걔는 체형이 마르고 탄탄해서 뭘 입혀도 입히는 재미가 있으니까.”, “오빠가 검은색 옷 좀 그만 사라고 했는데. 검은색 옷만 보이네. 나는 검은색을 좋아하나 봐. 옷장에 검은색 옷밖에 없어.”, “이거 크다! 이거 입어 봐.”, “어우, 이건 너무 아니다. 나한테 진짜 아니지. 그치.” 모두 한 사람이 낸 소리였고, 상대방은 ‘웅’, ‘아니’, ‘왜’ 세 가지의 대답을 돌아가며 할 뿐이었다. 왜인지 나도 속으로 ‘웅아니왜’를 함께하고 있던 기분이었고, 대답을 너무 많이 한 기분이라 서둘러 빈티지 숍을 나와 카페로 향했다.


  아란이 가 보고 싶었으나 못 갔으니 내게 가 보라고 추천해 줬던 카페에 갔다. 생각지 못한 오르막을 한참 올라서 카페에 도착했다.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어지는 문들이 동그랗게 나 있는 게 예뻤고, 동글동글한 소금빵이 공간에 맞게 잘 어울렸다. 이번 제주에서는 새어 나오는 빛들을 유독 유심히 보게 됐다. 빛과 빛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나뭇잎 사이로 쪼개진 빛을 한참 바라봤다.


누옥


  나는 피치 블로썸 티를 시켰고, 내 앞자리에는 여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나는 오 분 만에 그중 한 명의 목소리와 발음과 웃음소리와 말할 때의 버릇까지도 알아채 버렸다. 그만큼 높은 데시벨이었다. 그녀는 MBTI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두 번째 글자인 S와 N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S일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딱 S였다고 그러면서 앞자리에 앉은 상대방에게 MBTI를 물었고, 반대편 사람은 까먹었다고, 할 때마다 계속 바뀐다고 그랬고, 그녀는 “아직 자신에 대해 잘 몰라서 바뀌는 거야!” 하고 떵떵거렸다. 이후에 자신은 오타쿠 기질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이어갔고, 웃을 때는 “악학학!” 하고 웃었고, 목소리에는 비음이 섞여 있었고, 어수룩한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근사근한 사장님의 웃음소리, 한 손님의 끊이지 않던 말소리, 어수룩한 말소리. 내가 하루 종일 한 말이라고는 “이거 주세요”, “감사합니다”가 전부였지만 여러 목소리 속에서 대화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어느 공간에서 어느 정도의 크기로 말하는 사람일지 생각했다. 목소리의 크기도, 생각의 크기도, 배려의 크기도 얼마나 되는 사람일지. 너무 내 이야기만 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너무 안 하지도 않고, 중심 잡힌 이야기를 할지, 부정적인 이야기는 덜어 내고 말하고 있을지. 말에 대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 구절을 마음에 새기며 잠들었다.


말을 많이 한 날에는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다. 혹여 내가 지나친 과장을 하지 않았는지, 상대를 배려하겠다는 일념으로 상대를 거북하게 하진 않았는지 따져 보게 된다.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 날에는 반성의 의미로 책을 더 열심히 보기로 했다. 책을 읽는 것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니까. 잠시 말하고 싶은 욕구를 차단하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태도의 말들, 엄지혜 (49p)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 한 달 살이 (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