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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Sep 01. 2021

제주 한 달 살이 (18)

2021년 8월 31일 화요일, 덜 지칠 힘

  팀 매니저인 준호가 제주도에 내려왔다. 내가 가고 싶었던 아랍 음식점에 갔고, 준호가 좋아하는 카페에 갔고,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준호가 가져온 책을 각각 읽었다. 준호는 산책하자 했고, 우리는 올레길을 걸었고, 나는 금방 바다가 보이는 카페를 발견하곤 예쁘다 말했고, 준호는 그럼 그곳에 들어가자고 그랬다. 번갈아가며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한 것을 했고, 카페에 들어갔을 때에는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여기 완전 개발하기 좋은 카페 아니야?"


듀포레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감성 충만한 카페를 두고 동시에 '개발하기 좋은 카페'라 말한 것이 웃겨서 푸하하 웃었다. 제주도에 있는 내내 회사든, 개발이든 내 성장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서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준호와 함께하는 동안에는 놀랍게도 회사와 개발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었다. 회사원 자아 잃은 건 아닐지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1초 만에 당장 내일 출근할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리하지 않고 줄줄 적어 놓았던 내 생각의 조각들을 읽었다. 질문을 통해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처음에 가졌던 질문과는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계속 같은 걸 되묻고, 빙빙 돌게 되고요. 그래서 결국 마지막으로 고민하게 된 건 이거예요. 왜 나는 스스로 변화시키고 싶은 부분들이 누가 말해 준 것이 아닌 이상 잘 떠오르지 않는 걸까.


  준호에게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해답을 구해 주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준호는 내게 주었던 피드백마저 그걸 수단으로 삼지 말고, 피드백들을 통해 자신만의 노력들을 찾아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나는 또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지 모르겠어요. 왜 변하고 싶은 부분이 없는 걸까요? 여태 늘 변하고 싶은 부분들을 찾아서 변화해 온 줄 알았다. 잘만 찾던 걸 못하게 된 것 같아서 답답했다. 그런데 내 결핍을 드러내며 말하다 보니 깨달았다. 아, 나는 내가 변화시키고 싶은 부분을 한 번도 직접 찾아본 적이 없구나. 해 본 적 없던 변화였구나.


  성장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 있던 성장 욕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성장 욕구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성장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입사했었지만 성장이란 무엇인지, 왜 성장하고 싶은 건지 고민해 본 적 없었다. 나는 이제야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던 성장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핍이 아닌 무지의 세계로 나를 넣는 것은 오히려 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흰 도화지의 상태임을 자각하는 것.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니 도전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늘 처음 해 보는 것과 새로운 것을 좋아하니까.


  답은 나 스스로 구해야 한다. 열흘 말할 거리를 하루에 몰아 말하고 난 것 같아 기가 빨렸지만 이만 보를 걸었는데도 발이 아프지 않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뻗어 잠들지도 않았다. 준호에게 오늘 고마웠다 전한 뒤 오늘의 대화들을 곱씹었다. 분명히 나눈 대화들에 무수한 힌트들이 있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해결 방안이 아니라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뿌려 놓은 양분들. 길어지는 고민들은 나를 지치게도 했지만 오늘 준호가 빌려주었던 책의 한 구절 덕에 나는 덜 지칠 힘을 얻었다. 당장 덜 지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내가 덜 지칠 힘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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