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일 수요일, 고백해야 하는 삶
종종 내가 하는 생각들이 잔뜩 예민해져 있을 때가 있다. 생각을 만질 수 있다면. 생각의 표면이 오돌토돌한 닭살처럼 느껴질 때. 닭살이 팔에 돋는다면 온 팔에 돋듯이, 나는 온 생각이 과민해질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요 며칠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전한 내 시간을 보내고 충전해 놓고는 숙제처럼 밀린 메시지에 답장하곤 했다. 왜인지 모르게 좋은 말을 해 주려 애쓰게도 됐다. 비건을 조롱받은 날들도 있었다. 단단해지자는 강박이 있었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깊이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말자…. 다짐은 오래가지 못하고, 생각은 생각을 부르고, 나는 나를 자꾸 고백하고, 고백해야 하고, 고백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도 고백하고 있고,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말하고 나면 또 머리를 굴렸다. 방금 내가 한 말 어땠더라. 나 왜 이렇게 말 많이 한 것 같지. 왜 저 사람은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 말을 하는 걸까. 나는 왜 누가 나를 생각해 주길 바라고 있지. 아, 말 그만하고 싶다. 그만 듣고 싶다.
“채윤 님 따라서 채식하러 왔어요.”에 뒤이은 “채식이요? 육식이 짱인데.” 같은 말에도 괴로웠다. 채식으로 대화가 이끌리는 것, 당연스럽게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다. “우리 누나도 비건 하다가 지금은 안 해요.” 같은 말까지도 힘들었다. 아직 중심을 잡아가고 있는 때에 듣기 힘든 말이었다. 무조건적으로 존중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어서 고작 이런 말들조차 힘겨운 걸까. 아님 내가 그냥 지금 지쳤나. 생각이 예민해져 있을 때라서 모든 말들이 그렇게 들리는 건가. 원래부터 내가 생각이 과했나.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일인가. 나는 분명히 에너지를 소진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자각하고 나니 말하고 듣는 모든 행위가 노동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노동을 혼자서. 대체 왜.
숨기면서 살 수 없는 소수자의 삶이란. 매일같이 먹는 것에서 티 날 수밖에 없는 삶이란. 나를 끊임없이 고백해야 할 것 같은 삶이란. 사실 지난주부터 나는 야금야금 지쳐 오고 있었다. 다만 지쳤다는 것을 말하고 쓴다면 그것이 확실해질 것 같아서 표현하지 않았다. 지친 건 지친 대로 흘려보내고, 좋았던 것들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오늘, 생각지도 않게 내 지침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비건 커뮤니티 <청귤 감귤 살롱>에 신청했다. 오늘이 비대면 OT 날이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불리고 싶은 이름과 나를 표현하는 비인간 동물, 그리고 가장 중심이 되어 있는 비거니즘 이슈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차례에 나는 고백해야 하는 삶이 괴롭다 말했다. 이 말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중언부언 덧붙이지 않아도 내 감정 상태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로였다. 다정한 공감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또 고민했다. 방금 나 어떻게 말했더라. 잘 말한 건가. 새로운 사람들이랑 이야기해 보는 것 너무 오랜만인데.
생각은 그저 흘러갈 뿐이라고 몇 번을 명상하고 수련했는데 아직도 나는 이 모양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고백해야 하는 삶, 오늘은 결국 내 소진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번잡한 생각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 좋은 대로 할 것이라는 것.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 흐르는 시간과 함께 생각을 잘 흘려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