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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Sep 03. 2021

제주 한 달 살이 (20)

2021년 9월 2일 목요일, 쉼

  “내 에너지가 소진된 것 같을 때에는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드라마나 예능 보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충분히 휴식하세요. 그게 훨씬 나아요. 연락에 죄책감 갖지 마세요. 그게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좋아요.”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몸이 찌뿌둥했다. 마음이 헛헛했다. 이럴 때 볼 만한 마음공부 영상을 찾았다.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 괜찮다고 다독여 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건 나만 그런 걸까, 모두 그런 걸까. 자유와 휴식만을 위해 온 여행이 아니라 생각들을 정리하고 더 나은 내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온 여행이어서 그런지 쉼과 불안이 함께 따라다니고는 했다. 오늘만큼은 목표고 뭐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자 마음먹었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고, 나중에 보려고 찜해 놨던 드라마도 보면서 한참을 빈둥거렸다. 보다 재미없어지면 그냥 끄고,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고, 쓰레기를 버리고 청소를 했다. 새내기 시절 집안일하는 게 스트레스 해소 방안이라던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청소기를 밀면서 그 마음을 상상했다. 그때는 특이한 언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득도한 언니네. 청소는 명상하는 것과 비슷한 일 같았다.


  텅 비어 버린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장을 보러 갔다. 채소와 두부로 꽉꽉 채웠다. 저녁에는 시래기밥을 해 먹어야지. 저녁 먹기 전에는 카페에 가야지. 비가 떨어질 것 같으니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왕창 읽어 버려야지. 생각나는 대로 착착 움직였다. 동네 근처 빈티지한 카페에 갔고, 구석에 앉아 책을 읽었고, 시선이 닿는 곳에 눈을 가만히 두기도 했다.


소이재


  꼭 집 같은 곳이네, 싶었다. 카페에는 타자기가 있었다. 중간중간 차작차작 손님들의 타자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다가 <서툴지만 푸른빛>을 읽기 시작했다. 여행 사진집이자 산문집이었다. 책을 통해 가 본 적도 없고 가 보고 싶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아이슬란드를 처음으로 꿈꿨다.


길을 헤쳐갈 때마다 하늘은 도시의 조각들을 조금씩 잃었고 도무지 가진 게 없는 나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안수향, <서툴지만 푸른빛> 22p


  더는 잃을 것도 없고, 보이는 대로만 나아가면 되는 곳. 이정표 없이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는 내가 궁극적으로 나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을 닮은 나라 같았다. 실존하지 않는 인물들이 상상되기도 했다. 겁 없이 인터넷에 소설을 올리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처럼 자유롭게 상상했다. 작가가 머물던 레지던스에 왠지 이런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고, 이 사람과는 정반대의 성향인 이 사람도 있었을 것 같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발목까지 물이 찼다. 쪼리를 신어서 다행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시래기를 푹 삶았다. 떡을 찌듯 시래기밥을 쪄 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던 것을 성공하는 기쁨은 언제나 나를 들뜨게 한다. 무기력을 달리다가 자전거 라이딩을 성공했을 때와 같은 기쁨이었다. 사진을 찍어 가족 채팅방에 보냈다. 시래기밥 해 먹었어. 아무래도 다 큰 것 같군. 아빠는 “ㅋㅋㅋ”, 엄마는 “자알했다. 아빠가 황달이 와서 걱정이네.” 했다. 우리 아빠 그만 아파야 되는데. 시래기의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나는 괜찮아졌다. 진심으로. 모두가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말로만 괜찮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을 때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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