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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Sep 04. 2021

제주 한 달 살이 (21)

2021년 9월 3일 금요일, 은선

  제주에 오기 며칠 전, 꿈에 은선이 나왔었다. 은선은 언제나 잔잔하고 평온한 친구였고 어떤 힘듦과 불안이 있어도 마음을 내려놓을 줄 아는 친구였다. 그래서인지 은선과 함께 있을 때에는 감정의 고저가 과하거나 덜하지 않았다. 은선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고 또 깊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 물결의 모양을 닮았다. 깊은 속내는 모든 고통이 지나간 뒤에야 드러나곤 했다. 언제나 자신보다는 남을 돌보는 사람이어서. 그런 친구가 꿈에서만큼은 아니었다.


  너무 힘든데 자신을 보러 프랑스에 와 주면 안 되겠냐고 그랬다. 은선이 스무 살이 되자마자 프랑스에 유학을 간 뒤로 육 년 간 들어 본 적 없던 말이었다. 힘든 그 순간에 힘들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프랑스에 와 달라고 말하는 것 모두. 평소의 은선이었다면 힘든 일이 얼추 마무리된 뒤에야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괜찮아’ 하며 걱정할 마음까지 걱정해 주었을 테니까. 꿈속의 나는 아무 고민 없이 당장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은선을 보러 가고 있었다. 그러다 꿈에서 깼다.


  깨자마자 은선에게 연락할까 고민했다. 괜히 힘들지도 않은데 힘든지 고민해 보게 될까 봐 연락을 아꼈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났고, 제주에서 은선의 장문 연락을 받았다. 은선은 힘들었다. 많이 힘들었다. 어쩌면 내 꿈에 나왔던 은선이 실제 은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연락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 한계였다고 그랬다. 오롯이 자신의 문제만을 신경 쓰기도 벅차 보였는데 여러 문제가 뒤섞여 있었다. 고단했다, 지쳤었다, 터져 버렸다와 같은, 평소의 은선이라면 쓰지 않을 법한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은선다웠다. 은선다운 것이 슬프게도 느껴졌다. 마음이 안 좋았지만 지금은 마음이 평온해져서 평온할 때 답장을 적어 보낸다 적혀 있었다.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책상 위에 내 이름을 적었다 그랬다. 힘들지만 매일 다시 일어나서 오늘을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랬다. 고통 때문에 오늘 있을 기쁜 일까지 놓치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냐고. 이전 연락에 내 힘듦이 묻어 있었던 것이 미안했다. 꿈속의 은선을 만나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 버린 것처럼, 은선을 위로하기는커녕 위로받아 버린다는 게, 그리고 그 위로에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게 참. 어느 날의 따뜻함은 목 막히는 슬픔이었다.


  나는 꿈에서처럼 힘들다는 말 한마디에도 너를 보러 날아갈 수 있으니 언제든지 털어놓고 싶은 게 있다면 털어놓으라 답장했다. 힘듦을 털고 싶을 때에 묵묵히 들어 주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씩씩하게 견뎌야 했을지 마음이 쓰였지만, 오늘도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바다 사진을 담아 보냈다. 은선처럼 책상에 이름을 적고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겠다는 멋진 말을 해 주지는 못 했지만 은선에게 마음이 닿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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