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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Sep 05. 2021

제주 한 달 살이 (22)

2021년 9월 4일 토요일, 투시

  외도의 한 카페를 찾았다. 입소문을 탄 탓인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여 있었다. 창이 크게 난 구석 자리에 앉았다. 조용할 것 같던 외관에 그렇지 못한 내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나와 주문을 받는 사장님. 돌멩이에 분필로 적힌 숫자가 진동벨을 대신했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thank you. 귀여운 공간이었다.


그럼외도

  책을 읽다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에서는 동그란 무지개인 햇무리가 보였다던데. 제주는 흐렸다. 종일 흐렸는데도 내가 앉아 있던 순간만큼은 눈이 시릴 만큼 하늘이 밝았다. 창 밖의 나뭇잎을 응시했다. 낡은 잎 속 작게 핀 꽃들이 보였다. 꽃송이 주위를 호박잎이 감싸고 있었다. 호박잎들 사이에 숨은 호박꽃 한 송이를 보았다. 아는 꽃 이름이람 손에 꼽는 나인데도 보자마자 호박꽃임을 알았다. 어떻게 안 거지. 우리 집에 호박꽃이 피었던가. 할머니의 굽은 등이 어룽거렸다. 앞마당에 피어 있던 호박꽃이 떠올랐다. 거실 한편에 자리하던 출처 없는 늙은 호박들을 생각했다.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남은 나의 여생 동안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알았더라면 더 잘했어야 했다.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은 가끔 나를 무력하게 한다. 보고 싶을 때 보고 싶다 전할 수 없는 무력함이란.


  개미는 나뭇가지를 오르고 있었다. 열심히도 오르고 있었다. 꼭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뭇가지 위를 걷는 개미를 본다는 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며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를 눌러 죽인 것이 개미와의 마지막 기억인 듯했다. 왜 죽였을까. 죽였어야 했을까. 개미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햇살이 점점 수그러들 때,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을 봤다. 나쁜 추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 수도꼭지를 트는 건 네 몫이란다. 네 인생을 살아라. 마음이 일렁였다. 남에게 해답을 기대하지 말아야지. 내 인생을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걷고 싶어졌다. 외도에서 이호테우까지 걸었다. 바닷바람이 거셌다. 바람을 안고 걸었고, 나를 닮은 파도를 보았고, 파도를 응시하는 사람을 보았고, 예쁜 소라 껍데기를 골라 말리고 있는 집을 보았다. 이호테우와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옅은 빛으로 물들었고, 이호테우 해변을 유독 좋아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이내 뚜렷해졌다. 하늘의 옅은 빛과 바다의 옅은 빛. 하늘과 바다 사이의 경계가 옅어서 이호테우 보기가 좋았다.


카페 진정성 종점

  자연스러운 뒷모습들과 잘 어울리던 책 한 권. 우연찮게 찾게 된 좋은 음악. 왜인지 모르게 예은이 떠올라서 그 음악을 예은에게 보냈다. Radient Children의 Poke Bowl. 언젠가 가깝고 먼 미래에 이 음악을 듣는다면 이제는 오늘의 이호테우가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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