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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Sep 06. 2021

제주 한 달 살이 (23)

2021년 9월 5일 일요일, 여전한 세화

  세화까지 먼 여정을 떠났다. 차창 너머로 사람 살 것 같지 않은 집들과 사람 살 법한 집들이 이어졌다. 밝은 음악을 듣다 말고 묵직한 리듬 앤 블루스를 재생했다. 가만가만한 음악을 들어 줘야 할 것 같은 날이었다. 비가 똑똑 떨어지더니 금세 빗방울이 굵어졌다. 절대 사람이 타지도 않고 내리지도 않을 것 같은 정류장에 사람이 내리고 탔다. 내리는 사람들과 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여기서 내릴 사람은 어디를 가는 길인 걸까.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제주시버스터미널

  한 시간을 달려 종달리에 내렸다. 이 년 전 방황하며 제주에 왔을 때 우연찮게 발견했던 주얼리 매장을 다시 방문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고, 사장님께서도 잘 알리고 싶지 않아 하시던 곳이었다. 하나하나 유별난 애정으로 탄생한 제품인 티가 났다. 가끔 세심한 예민함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작품들은 예민하기 때문에 섬세한 마음을 담아 완성할 수 있는 작품인 티가 난다. 그것들의 진가를 아는 사람에게만 그 제품이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표가 난다. 지도 앱에서 검색하더라도 이름이 뜨지 않는 곳인 것, 인스타그램 계정을 비공개 계정으로 운영하는 것, 주말에 두 시간씩만 영업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제품 사진 촬영을 금하는 것. 그런 데에서 세심한 티가 났다. 이 년 전의 나는 작은 원 모양의 은 목걸이를 샀었고, 숫자 5를 각인했었다. 이번에는 애끼 반지와 원석 팔찌를 구매했다. 팔찌에는 글자 두 개를 각인할 수 있었다.


  “25로 해 주세요.”

  “왜요?”

  “재작년에 목걸이 사 갈 때 5로 새겨 갔었거든요. 25 하면 이제 제 생일 완성이에요.”

  “아, 예전에 오신 적 있으시구나. 목걸이 착용 중이시네요. 다시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 팔찌 원석은 아쿠아마린이에요. 아쿠아마린은 젊음을 뜻한대요. 팔찌 줄 줄여 드릴게요. 이 팔찌는 짧은 줄이 멋있거든요.”


  목걸이를 구매할 때도 고리 부분을 앞으로 오게 착용하라 말씀하셨었다. 숫자 5를 각인할 때에도 알파벳보다 숫자를 각인하는 사람이 좋다 그러셨었다. 이번에는 각인하는 숫자의 이유를 물었다. 원석의 상징을 전해 주셨다. 자신의 작품을 가장 멋지게 착용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잊지 않았다. 이 년이 지났는데도 다른 것 하나 없어진 공간이었고, 나는 처음 왔을 때보다 그 공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다.


  비바람이 점차 거세졌다. 세화로 이사한 책방 <풀무질>에 갔다. 전보다 소담해진 공간이었지만 사장님의 따스하고 밝은 에너지는 여전했고, 환경과 페미니즘에 관련된 도서들이 가장 잘 보이는 매대에 자리한 것 또한 여전했다. 구매하려 했던 <물결> 여름호는 책방에 없었지만, 마음에 드는 시집과 환경 도서를 여러 권 발견했다. 좋은 책을 만나고 나면 맛있는 밥을 한 그릇 먹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 든다. 든든한 마음으로 톰톰카레에서 버섯카레를 먹고, 온통 푸른빛이었던 평대 해수욕장을 구경했다. 내가 본 동쪽 제주는 언제나 회색빛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전했고, 나는 여전한 것들이 갈수록 좋아졌다.


책방 풀무질, 톰톰카레의 버섯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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