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린 May 31. 2021

[햇-마:당 presents] 이불 밖은 위험해

지난 1년, 코로나가 내게 일깨워준, 내 공간의 소중함.



    내 꿈은 어릴 적부터 독립이었다.


    20대 초반부터 셰어하우스를 전전하다 마침내 사이즈는 작아도 나 혼자 생활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마련한 것은 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공간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오롯이 내 기준에 맞춰진 나만의 공간,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에게 100프로 최적화된 공간은 코-시국을 겪으며 또 하나의 가치를 얻게 되었다. 내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위생적이고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운 청정 공간. 코로나로 모두가 집에 있는 게 필수 덕목이 된 뉴 노멀의 사회에서 집순이는 정부 및 보건 당국의 지침을 매우 충실히 따르는 성숙한 시민으로 탈바꿈하였다. 누군가는 나에게 답답하지 않냐며 사무실에 나가고 싶지는 않은지, 야외 활동이 그립지는 않은지 재차 물어보지만, 나만의 파라다이스를 마다하고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밖에 나가야 하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거리두기가 실시된 이후 초고속으로 발달한 온라인 환경에서 쇼핑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활동을 해결하다 보니 락다운이 재차 연장이 되는 이 상황이 딱히 불편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물론 나도 가끔은 예전의 일상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맘 편히 예약 없이 미술관에 가고, 목적 없이 여러 상점을 드나들며 거리를 쏘다니고 싶고, 커피가 맛있는 카페에 들러 괜히 책도 읽고, 친구들을 만나 펍에서 맥주 한 잔 기울이고 싶을 때가 있다. 지극히 내 공간을 사랑해서 뼈 속까지 집순이인 나에게도 바깥세상이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활발하고 사람들 만나는 거 좋아하는 이들에겐 이 상황이 얼마나 끔찍할지 십분 이해는 된다.


    사실 돌이켜보면 이 시국을 잘 이겨낼 수 있는 건 공간의 덕이 크다. 나는 운 좋게 코로나가 시작된 무렵 현재 지내고 있는 스튜디오를 얻어 딱히 불편한 점 없이 생활하고 있지만 만약 내가 셰어하우스에 계속 살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안심하며 살 수 있었을까. 하우스메이트가 어디서 누굴 만났는지 늘 신경 쓰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지금 현재 내 상황에 너무나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에게 이런 공간적 여유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겐 이제는 일상이 된 서로 간의 1.5 미터의 간격도, 타인으로부터 온전히 분리되어 지낼 수 있는 내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마저도 누군가에겐 사치이고 불가능한 현실이기도 하다. 공간이란 마치 공기와 같이 무형의 존재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물리적인 바운더리를 통해 공간이 규정되는 순간 그 공간은 상품성을 띄고 사용자의 사회적 계층을 반영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방역의 기본 원칙으로 내세워진 사회적 거리두기는 나와 타인 사이의 물리적 거리두기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너무나 당연한 듯한 그 정도의 거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계층이 있다는 것이 이번 팬데믹을 통해 드러났고 우리 사회의 취약점은 집단 감염의 형태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재택근무는 사무직의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한 물류센터에서는 거리 두기는커녕 늘어난 물동량에 대처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최소한의 방역도 없이 감염의 위험에 노출된 채 일해야 했다. 그럼에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 공간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교도소 및 기타 교정시설의 경우 공간 구성의 제약과 단체 생활을 한다는 특수성 탓에 세계 곳곳에서 집단 감염의 사례를 보였다. 공간적으로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 보니 방역 수칙을 상황에 맞게 대체하여 시행하고 있으나, 실제 수감자들에 따르면 대체된 수칙으로 인해 그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한 교도소의 경우 샤워 시설 등 공동 시설의 사용을 제한하고 원하는 수감자에 한해 시간을 예약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주어진 시간과 허용된 인원이 한정된 탓에 길게는 한 달 까지 샤워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범죄자라 할 지라도 최소한의 인권은 지켜져야 하는데 그마저도 위협당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물리적 공간을 부여받지 못한 계층에게는 거리두기와 같은 방역 지침이 그들의 건강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생계와 인권을 위협하는 공격적인 수단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수세기를 거치며 성장해 온 인류 사회는 모두의 인권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로 꾸준히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공간도 발전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공간은 계층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사각지대에 놓인 인권은 이번 코로나로 인해 곪은 상처가 터지듯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전쟁 등의 위기가 그러했듯 코로나도 인류에게 또 다른 발전을 가져올 테고, 분명 우리가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생겼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지 않는가. 이번 기회에 단순히 공간을 1.5 미터의 그리드를 통해 재해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공간이 보여주는 계층 간의 차이를 한번 더 상기하고 우리에게 주어져야 하는 최소한의 인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인권을 반영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주어져야 하는 공간이란 어떤 공간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March, 2021]


이 글은 햇-마:당 에디션 YEAR: AC 1 에 소개 된 글입니다.

hetmadang.com에서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어보세요!

작가의 이전글 나는 팔자 좋은 유럽의 취준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