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기차에서 내렸다. 엠이 열차 출입문에 매달려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난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핌피가 나를 발견할까 봐 두렵기도 했지만, 이미 짐을 다 챙기고 내려 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산 지미냐노 별장에서 체크 아웃을 하는 아침이었다. 밤새 모기에 시달리며, 잠을 설친 탓인지, 엠보고 소파에서 자라고 할 만큼 쌓인 내 마음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늦잠을 잤다. 시간에 맞춰 렌터카 반납을 해야 했고, 기차역으로 가야 했다. 핌피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우린 급하게 깼다. 설거지를 하다가 깨진 유리컵에 손이 베였다. 남은 식료품 정리를 하는 중에, 엠은 커피를 끓여 먹겠다며 싱크대에 뜨거운 물을 틀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다시 물을 틀었다가 손이 데었다. 분리수거를 해서 쓰레기를 내다 버렸어야 했는데, 이 북미인 둘은 ‘역시 유럽이네.’하며 느긋하게 굴고 있었다. 성미 급한 한국인인 내가 빠르게 쓰레기를 손으로 집어 가며 분리수거를 했고, 그날 아침 결국 내 오른손은 호되게 고생하고 말았다.
사실, 엠 역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나와 핌피가 탄 차를 2시간 동안 안전하게 이탈리아 고속도로 위를 운전해야 했으며, 렌터카 반납부터 기차 탑승까지 여러 제한 시간에 마음이 급했다. 나는 그걸 이해했기에,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소일거리들을 처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다 일이 터진 건, 라스페치아 기차역에서였다.
우린 정오 직전에 기차를 타고 우리의 다음 행선지 베르나차로 가야 했다. 렌터카 반납소와 기차역이 멀다는 사실을 미처 놓친 엠은 허겁지겁 택시를 불렀다. 이탈리아 택시는 거의 다 메르세데스 벤츠 승합차다. 난 의자를 접을 새도 없이, 틈 사이로 몸을 집어넣어 뒷자리에 탔다. 아슬아슬하게 기차역에 도착했고, 우린 허겁지겁 택시에서 내려 역 안으로 갔다. 핌피는 이미 많이 지쳐 보였고, 나는 그녀를 위해 차가운 물을 사다 주었다. 엠은 몇 번 승강장으로 가야 할지 알아보기 위해 전광판과 휴대폰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난 알아챈 것이다. 내 아이폰 7이 사라진 것을. 공기계로 가져온 폰인데, 여행 첫날부터 내 아이폰 13 미니가 말썽이어서, 서브폰으로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택시에서 좁은 틈에 몸을 욱여넣으며 타고 내리는 사이에 폰이 주머니에서 빠진 것 같았다. 엠은 택시를 불러준 렌터카 회사에 전화를 하여, 차 안에 내 폰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택시 기사의 전화번호까지 확보했다. 정말 대단한 속도였다. 그렇게 하는 와중에, 약간 예민해진 핌피는 내게, 그렇게 매일 사진을 찍어대면서 폰이 사라진 걸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말했고, 나는 그때부터 마음이 곤두박질쳤다. 엠이 폰의 위치를 확인하는 동안, 기차는 도착했다. 우리 셋은 무거운 짐을 들고 세네 개나 되는 계단을 뛰어 오르내리며 헐레벌떡 기차에 탔다. 나는 핌피가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만석인 기차에서 겨우 핌피의 좌석을 하나 찾아 앉혀 드리고, 우리는 약간 멀리 떨어져 짐칸 앞에서 서있었다.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엠은 땀을 흘리고 있었고, 나는 숨이 가빴다. 여태껏 이런 일 없게 하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여행을 했는데, 이렇게 실수를 해버리다니. 폰을 잃어버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내’ 물건 하나 때문에 모두를 고생시킨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온 것이다. 수시로 터널을 지나며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흔들거리고 갈증이 나는 기차 내부. 내 뇌는 한껏 상기되어 세상 모든 스트레스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엠의 눈치를 보며, “이것만 아니었다면 완벽한 여행이었겠지?”라고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엠은 “그렇지, 이것만 아니었으면 완벽했겠지.”라고 대답한 것이다. 엠은 농담 삼아한 말이었고, 나는 농담을 받아들일 만큼 쿨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폭발했다. 터널 속에서 기차는 멈췄고, 덜컹 거리는 순간, 사람들은 작은 배낭들이 짐 칸에서 떨어졌고, 인터넷은 끊겼다. 나는 내 캐리어와 배낭을 들고 출입구로 갔다. 그리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래. 나만 없으면 당신들의 여행은 완벽하겠지.'
여태껏 쌓여 온 스트레스가 완벽하게 잘못된 방식으로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눈칫밥과 자격지심이 숯과 장작이었고, 여행지에서 흔하디 흔하게 일어나는 물품 분실이 불씨였고, 내 맘 참 모르는 엠의 악의 없는 농담이 기름이었다. 이제는 안다. 나의 대처가 아주 미성숙했으며, 엠도 조금 더 센스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며 미안해하였고, 그 모든 건 여행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이었다고. 우린 심플하고 쿨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드라마틱하게 기차역에서 내리는 그 순간만큼은 난 오롯이 한 가지만 생각했다.
해방감.
웃긴다. 해방감이라니. 나는 인질로 잡힌 것도 아니고, 좋은 숙소에서 맛있는 밥 대접받으며 즐겁게 여행하고 있던 것인데, 왜 내 안에서는 탈출의 욕구가 자라나고 있었던 걸까. 무엇이 그렇게 갑갑했던 것일까. 사랑하는 애인과 껴안고 있는 게 너무 좋은데, 땀이 좀 나고, 가끔 혼자서 한없이 멍 때리고 싶은 순간이 있긴 했어도, 그래도 우린 장거리 연애를 하는 중이니까,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아는데. 친절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애인의 외할머니와 편하게 대화하며, 내가 해드릴 일은 그다지 많지도 않았고, 불평은 하시지 않고, 언제나 계산을 다 하시는 멋있는 분과 여행할 수 있다는 건 심지어 영광일 텐데. 나는 왜 기차에서 내려 혼자 승강장을 세차게 걸어가며 마침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을까. 사랑을, 행운을 부정하지 않은 채로 이 해방감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홧김에 기차에서 내리긴 했지만, 계획은 없었다. 겁이 나진 않았다. 그냥 로마로 돌아가 숙소를 잡은 뒤 남은 일주일 동안 혼자 지낼 수도 있었다. 일단 잃어버린 폰은 라스페치아 역에 있으니까 그곳으로 돌아가면 되겠지. 나는 냅다 매표소로 돌아가, 역 이름을 어설프게 발음해 가며, 다음 기차 일정을 물었다. 그는 3번 승강장에 오분 뒤에 오는 기차를 타랬다. 나는 여태 타고 오던 낡은 기차와는 다른, 신식의 깨끗하고 밝은 기차에 올라탔다. 짐이 무거워서 낑낑거리고 있으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타나 도와줬다. 빈자리가 없을까 걱정했지만, 넉살 좋게 생긴 프랑스인 부부가 자기 짐을 치워주며,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수줍게 메르씨- 감사 인사를 했다. 사실 티켓도 없었다. 보통 이런 기차는 앱으로 기차 티켓을 결제할 수 있기 때문에, 와이파이에 연결을 시도했다. 그러던 중, 5분도 안되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안내음.
"다음 역은 베르나차 역입니다."
물음표. 내가 기차표를 끊은 것도 아니었고, 엠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확실하게 아는 것은 하나 있었다. '베르나차'. 우리가 앞으로 일주일 동안 머물 곳의 이름이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우린 라스페치아역에서 출발해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그건 베르나차로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중간에 혼자 내려버렸고,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새 기차를 탄 것인데. 왜 우리의 목적지가 이 기차의 다음 역인 것인가.
느낌표. 애초에 엠이 탄 기차가 잘못된 기차였던 것이다. 이상한 기차였다. 낡고, 역을 알리는 모니터도 없었으며, 원래 10분 정도면 도착한다고 했는데, 기차가 멈추지 않고, 웬 이상한 터널에서 냅다 정차하기만 했다. 그 사이 동굴 터널을 지나 나올 때마다 바닷가 마을이 보였으며, 그걸 꽤 여러 개 보았는데, 바로 그것이 ‘친퀘테레’였던 것이다. ‘다섯 개의 항구’라는 뜻의 이 지역 중 하나가 베르나차이다. 우린 앞 마을을 모두 지나쳐왔고, 내가 홧김에 내렸던 그곳이 마지막 항구 '몬테로소'였다.
이 느낌표를 띄울 새도, 판단할 새도 없이 일단 새로운 기차에서 내렸다. 지도 앱을 켜보니, 우리 숙소가 2분 거리에 있었다. 의도치 않게 난 목적지에 올바르게 도착해 버린 것이다. 그럼 이제 결정을 해야 했다. 여기에 남아 엠을 기다릴 것인가, 아님 그냥 그대로 다시 라스페치아 역으로 돌아가서 로마로 갈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베르나차역에서 쪼그려 앉아 1시간 반동안 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여전히 화가 많이 나있고, 우리가 그 사이에 했던 연락의 내용은, 엠이 이탈리아 북부 끝 제노바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정도였다. 화해도 사과도 하지 않은 채로 서먹하게, 여기로 돌아올 기차 정보를 공유할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선택을 내린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렇게 내가 여행에서 탈주해 버리는 것은 핌피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먹여주고 재워준 어르신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될 짓이었다.
두 번째, 어차피 헤어질 마음은 없다. 화가 미친 듯이 나고, 더 싸울 것이었고, 쉽게 풀릴 사건은 아니었지만, 나 자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헤어질래?” 물어봤을 때, 대답은 “아니.”였다. 연애 관계에서 일어나는 대다수의 갈등은 어쨌든 결국 이 질문으로 귀결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헤어질 거야?” 나는 “응.”이라는 대답이 이별로 직결되는 경험도 해봤기에, “아니.”라는 대답의 진정성을 알았다. 차라리 아직도 얘를 너무 사랑하는 내 마음을 원망할지 언정, 이 관계를 끝낼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기차역 바닥에 주저앉고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분노가 다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 마음이 여러 번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간 반동안 나를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마찬가지로 딱 두 개였다.
담배와 광경들.
유럽은 아무 데서나 담배 피운다. 심지어 기차역에서도 흡연 구역 따로 없이 담배를 피운다. 금연 구역 표시보다 재떨이가 더 많이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나도 담배를 피웠다. 한두 세 개비 피웠나.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다.
베르나차역은 아주 작았다. 전체 승강장이 열차 두 칸 정도의 길이였다. 그래서 역 중앙에 앉아 있으면 전체 광경을 다 볼 수 있었다. 일본 관광객 서너 팀이 오고 갔다. 이곳은 다른 항구에 머무는 사람들이 낮에 잠시 해변에만 들리는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기에, 수영복을 입고 기차에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화려한 패턴의 비키니부터, 누드색의 모노키니에 깜짝 놀라고, 아이들은 물 밖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수영모를 벗지 않고 돌아다닌다.
화룡점정은 스페인 여자 네 명과 이탈리안 기관사의 20분가량의 싸움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핀터레스트 패션을 고루 입은 이 여자들이 끊은 티켓은 오후 6시 기차였고, 기관사는 그 티켓으로는 이 기차를 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오후 1시였으니까. 하지만 어쩐 이유에선지, 여자들은 꼭 지금 돌아가야만 한다고,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냐고, 시간은 달라도, 같은 돈을 내고 기차 티켓을 구매했지 않느냐고 따졌고, 점잖게 생긴 덩치 큰 기관사는 쩔쩔매는 것이다. 여자 애들 중 한 명은 이성적으로 대처하려는 똑똑한 스타일, 두 명은 감정 표현이 큰, 마침내는 울 것 같은 목소리를 내었고, 한 명은 그들 뒤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모두 영어로 소통하고 있었지만, 각각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의 억양과 특유의 커다란 몸짓이 동반되었다. 여자애들은 기관사가 너무 자신을 몰아세운다고, 진정하란 식의 패를 꺼내 들었고, 얼떨결에 기관사는 위협적인 인물이 되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뒤에 앉아 있던 여자애가 현금을 기관사에게 던지며 그럼 이 돈으로 새 티켓이나 끊어달라고 무례하게 굴었고, 그나마 웃는 얼굴로 대응하던 기관사는 이런 식으로 굴지 말라며, 화를 냈다. 기차는 연착되기 시작했고, 승객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그런데 유독 역무원들만큼은 포스가 강해서, 아무도 컴플레인을 걸지 못했다. 다들 그냥 관객이 되어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중립적인 자세로 가만히 지켜보다, 돈을 던진 여자애의 무례한 행동을 보고 기관사의 편이 되어 속으로 응원했다. 결국 그들의 다음 기차 티켓을 새로 끊었어야 했으며, 한참을 정차해 있던 기차가 마침내 출발했다. 나는 이 여자애들이 되게 못된 애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뒤, 우연히 다시 마주쳤을 때, 핌피의 짐을 옮겨 주며 도와주려는 그들의 선의를 보고 놀랐다. 도대체 인간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흡연하며 한 바탕 싸움 구경을 하고 나니, 엠과 핌피가 왔다. 우리는 미리 말을 맞춰 놨기에, 핌피는 내가 폰을 찾으러 다시 역으로 돌아갔다가, 베르나차에 먼저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괜히 더 웃고 활발하게 굴며 우리의 싸움을 우리만의 일로 남겨 두려 노력했다. 엠은 이미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내가 기차에서 내렸고, 자신은 속수무책이었고, 심지어 기차까지 잘못 타 저 끝 제노바까지 갈 뻔했으니 말이다. 맘고생 심하게 했을 그 애의 몰골을 보니 마음이 또 엄청 쓰렸다.
그날 밤, 내가 먼저 사과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의를 보였다. 그 애 역시, 나의 마음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으며, 우리는 앞으로 좀 더 세심하게 소통하기로 했다.
사랑이 과열되면 가끔 그 열기가 스트레스로 착각되곤 한다. 별 것 아닌 일들에 질식하며 상대를 원망하고 이유도 모른 채 우리 관계를 망가뜨린다. 네가 던진 농담이 내겐 오해가 되고 그 오류에서 '홧김에'의 행동이 생겨난다. 혹은 내가 한 실수가 너보다 나에게 더 상처가 되어 삐뚤어진 사과를 던져버리고 자리를 뜨고 만다. 그러나 떠난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춰 본다. 담배를 피우고(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나는 해방감의 이유 따윈 찾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이 사랑과 열기를 쿨하게 받아들이면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린 세상에서 제일 쿨한(멋진) 커플이니까." 너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게. 완전하지 않은 두 사람이 만나 이 연애라는 것을 멋지게 완성시키는 거니까. 우린 이렇게 고충을 겪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이후 베르나차에서 보냈던 6일은 정말 좋았으니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