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천둥 번개가 치는 밤이었다. 나는 잠에 취해 번쩍이는 빛이 번개인 줄도 모르고, 하늘을 울리는 거대한 소리가 천둥인지 모른 채 두려워했다. 엠을 껴안았던 기억만 난다. 아니, 껴안으니까 안전하다고 느꼈다는 사실이 기억이 난다. 누군가와 몸을 부대낄 때만 느낄 수 있는 안전함. 키스보다, 섹스보다 가끔은 포옹만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엠은 착하다. #착함 해시태그를 붙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잠을 설쳐 그 애의 껴안으면, 곤히 자는 와중에도 내 팔을 얼러 만져주고, 잠들기 직전 항상 물을 가득 채운 컵을 준비해 준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수면하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장면처럼, 함께 자는 연인의 들숨과 날숨을 세다가 잠에 드는 편이다.
여행지에 가면 침구를 살피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누구는 베개를 아예 가지고 다니거나, 침대 위 특정 위치를 고집하기도 하며, 수면 안대, 아로마 오일 등 각종 수면 보조 용품들을 한 아름 싸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는 그냥 잘 자는 편이다. 다만, 에어컨을 틀어 놓으면 다음날 무조건 인후통이 생기기 때문에, 덥게 자는 편이다. 보통 내가 엠보다 먼저 기상하는 편인데, 입술을 쭉 내밀고 약간 부은 볼을 하고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본다. 너무 귀여워서 한 입에 다 먹어 버리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먹음직스럽고 예쁜 솜사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린 피렌체에서 잘 잔 편이었다. 약간 더워지면 에어컨을 켜고, 내가 다시 추워지면 엠을 툭툭 친다. 그럼 자다가 일어나서 엠은 에어컨을 끈다.
침대는 충분히 넓었는데, 나는 자꾸 가장자리까지 밀려난다. 나를 안고 있는 그에게 네 쪽에 공간 많지 않냐 물으면, 엠은 차라리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라며 몸을 돌린다. 어이가 없다. 우린 그런 식으로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며 밤의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다.
밤 중 폭우는 멈췄고, 축축한 아침 일찍 우리는 우피치 미술관에 갔다. 피렌체에서 가장 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있는 곳이기도 한 이 미술관은 핌피의 희망사항이었다. 우린 작품의 개수에 압도되었고, 관람객의 숫자에 진이 빠졌다. 예수가 십자가에 박힌 장면이나,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장면이 다양한 스타일로 아주 많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각자를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밌었다. 물론 이 아기 예수가 저 아기 예수보다 귀엽게 생겼네, 정도의 비교였지만.
이 미술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창문이다. 각 방마다 미술품이 한가득인데, 사람들은 복도로 나와 다른 방으로 옮겨 갈 때면, 창 밖 풍경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감탄했다. 이 미술관은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강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건너편 피렌체의 북쪽 동네가 훤히 다 보였다. 여러 색채의 건물들과 동네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각 창문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렸다가 풍경을 뒷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정도였으니… 역시 자연이 예술보다 더 아름답나 보군, 생각하게 만드는 현상이었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너무 많이 걸은 탓에, 우리는 다음 날 일정으로 레몬 가든을 가기로 계획했다. 피크닉을 하는 것이다. 날이 덥긴 하지만, 그늘에 가면 바람이 선선했고, 또 도심 내부에 조용한 정원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원은 사이즈가 다르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우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돗자리를 깜빡했다고 아쉬워하던 참이었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센트럴 파크 정도의 가든을 예상했던 우리는, 마을 하나를 맞딱 드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정원은 커다란 미로처럼 구성되어 있고, 그 사잇길은 모두 경사가 가팔랐다. 피크닉이 아니라 하이킹이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그려진 표지판을 따라 움직였는데, 그곳이 당연히 카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이스크림 표지판은 목적지에 다 달으면 항상 사라졌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오솔길에 쿠키가 놓여 있어 따라가는데, 자꾸 어느 순간 그 쿠키 행렬이 끊기는 것과 같은, 그런 어린애의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린 땀을 뻘뻘 흘리며 가든의 반대편 출구를 찾아 바로 퇴장했다. 어쩌면 이 정원에서 우리가 한 일은 내내 쫓아가기, 그러다 도망가기였을지도 모른다.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인생 최고의 봉골레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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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읽는 동안 너는 새로 산 가죽 구두를 열심히 닦고 핌피는 남은 샐러드를 먹는다. 여행을 가면 엠은 빈티지 쇼핑하는 것을 즐긴다. 그는 늘 목표를 세운다. 예를 들면, 멕시코 시티에선, 보헤미안 풍의 짐가방을 사야지, 이번 피렌체에선, 여름 가죽 구두를 사야겠어.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찾으러 다닌다.
나는 엠이 쇼핑하는 동안 가끔씩 가게 밖을 나와 보도블록에 앉아 있고는 했다. 빈티지샵은 먼지가 너무 많아 계속 재채기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가에 앉아 있으면, 다양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택시가 오지 않아 수북한 캐리어 더미를 끼고 기다리고 있는 가족, 아버지는 우버를 부르고, 어머니는 어딘가 전화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캐리어 위에 멀뚱히 앉아 있거나,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장난을 친다. 또는 신혼부부로 보이는 아시안 커플. 무심결에 한국말이 들린다. 피렌체에서 한국말을 총 4번 정도 들었는데, 모두 다음 일정에 대한 내용의 대화였다. 어떻게 가고,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해서. 타국에서 지나치는 모국어를 잡아채는 순간은 소중하다. 그리고 내 옆에서 어영부영 걷고 있는 엠과 핌피를 보며, 그 한국인 커플이 새삼 편리해 보이기도 했다. 아이러니다. 느긋한 이들과 함께 있으며 마음이 정화되면서도, 깊숙한 본능 속에는 분주함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이탈리아의 여름은 해가 아주 길다. 오후 아홉 시까지 밝다. 우린 늦은 저녁을 먹고, 강가로 나와 젤라토를 사 먹었다. 핌피는 라즈베리 맛을, 나는 바닐라와 초콜릿 조합을, 엠은 카푸치노 맛을 골랐다. 이탈리아에서 먹는 첫 젤라토였다. 강 다리에 기대어 먹는데,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다. 쨍한 주황색의, 정갈하게 동그란, 거대한 오렌지가 천천히 입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오렌지맛 젤라토가 먹고 싶어진다. 우린 열기에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에 집중하면서도 거대한 오렌지 태양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혀와 눈이 따로 논다.
그러다 문득 내가 핌피에게 묻는다. 일출이 좋아요, 일몰이 좋아요? 왜냐면 피렌체 시내로 나가는 첫날, 나는 그녀에게 쇼핑을 좋아하냐고 묻자, 인생의 앞 50년은 물건을 사며 시간을 보내고, 뒤 50년은 그 물건을 다 버리며 시간을 쓴다는, 아주 현학적이고 멋있는 대답을 내놓았던 핌피였기 때문이다. 핌피는 노을을 좀 더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몇십 년 전 멕시코의 한 섬으로 놀러 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섬은 작지만 태평양과 맞닿아 있어서 각 섬의 끝에서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주 작은 동네였는데, 거기서 알게 된 동네 유일한 의사의 지프차를 빌려 타고, 섬 전체를 돌며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출과 일몰을 번갈아 보았다고 한다. 그게 기억에 너무 남는다고, 그렇게 동시 비교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은 노을이 더 좋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핌피는 그 의사 집에 불이 났는데, 동네가 너무 작아 소방관이 없어 마을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와 불을 끄려 노력했다는 말도 덧붙이며 안타까워했다. 순간 그 안타까움의 표정이, 과거에 대한 그리움인지, 불이 나 버린 의사 가족의 사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핌피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오렌지는 거의 꼭지까지 몸을 담갔다. 우린 마치 새해 전야처럼 카운트다운을 하며 해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봤고, 정말 마법 같게도, 10초 만에 해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우린 다 먹은 젤라토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끈적이는 손가락을 핥으며 귀가했다.
몇 년 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가 있다. <님포매니악 볼륨 1>. 섹스 중독으로 인생을 망친 여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긴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마디를 한다.
“내가 지은 죄가 있다면, 그건 아마 내가 노을로부터 너무 많은 걸 바랐기 때문일 거예요.”
이 대사를 이해하기 시작한 건, 올해 초였다. 문득 노을을 보다가 걷잡을 수 없는 공허함에 질식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해가 떨어지는 이 순간이 너무 아름다운데,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족할 수 없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그게 노을로부터 더 많은 걸 바라는 것과 같구나. 내가 해가 지는 것에 감탄하고 하루를 잘 끝냈음에 감사하게 되는 날이 올까? 과연 그날이 오길 바랄까? 어쩌면 나는 계속 더 갈망하며 평생 살아가지 않을까? 노을에게는 답이 없다. 그냥 강에 풍덩 빠지는 거대한 오렌지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생오렌지 즙을 짠 주스가 정말 신선하고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