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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지미냐노 별장 (하)

2장

by 채리 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정확한 입구는 없었다. 체크인 카운터도, 로비도 없었다. 건물을 크게 둘러서 수영장이 있는 쪽으로 가니, 키가 큰 젊은 남자가 우리를 반겼다. 차례로 악수를 하며, 영어로 소개를 하던 중, 그는 핌피가 멕시코시티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스페인어로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가 기름 지고, 근육이 다부진, 그렇지만 마른 몸의, 개성 있는 옷차림의 이탈리아 남자였다. 이름은 카를로. 말 끝마다 오께이?를 붙이며 묘하게 리듬을 만들어 냈는데, 그건 그가 신은 에어 조던과 뒤집어쓴 슈프림 모자에서 풍기는 힙합의 느낌과 잘 어울렸다. 이 더위에도 정강이까지 오는 흰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고집하며, 청록색 클래식 bmw 오픈카를 탄다. 그는 베를린 언더그라운드 디제이처럼 생긴 정원사도 소개해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잔디를 깎다가도 날아가는 나비를 보고 살며시 웃는 걸 보면 에어팟을 낀 순수한 영혼 같다. 우리 외엔 영국 여자 두 명이 머물고 있었고, 그들마저 내일 오전 일찍 체크아웃이라 했다. 돌아오는 주말에 큰 파티가 있어 그들은 맥주 박스를 잔뜩 쌓아 놓은 걸 볼 수 있었는데, 우린 딱 그 전날 떠나는 일정이라 약간 아쉬워했다. 알고 보니 별장 주인의 친구 중 이발사가 있는데, 그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는 것이라 했다. 현재까지 알 수 있는 점은, 어쨌든, 이 시골 마을의 경관 좋은 언덕 중앙에 성만 한 별장을 지어 놓고, 수영장과 정원을 관리하며, 친구들의 파티를 때때로 열어 주는, 오고 가는 손님은 거의 없는 곳. 필시 그는 이 땅 주인의 아들이거나, 예전에 이곳을 소유했던 영주의 후손일 것이다.


(위 사진은 엠이 하이킹 중 발견한 농가의 작은 집)


계속 별장이라 불러왔지만, 사실 모텔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어쩌면 작은 학교 건물과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건물 뒤편으로 각 방의 출입구가 나있는 이층 건물이며, 전체 라인에 네 개 정도의 방이 있다. 우린 첫 번째 호실을 배정받았다. 열쇠를 받았지만, 사실 여기에 들어오는 외부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우린 자주 문을 잠그지 않았다. 주방과 다이너 공간, 거실 소파까지 콤팩트하게 현관 앞에 구성되어 있고, 안쪽으로 작은 방과 욕실, 큰 방이 있다. 이 숙소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인테리어 소품들이었다. 시멘트 벽이나, 나무 문, 찬장, 침대 등의 큰 가구들은 여느 이탈리아 옛날 집과 다르지 않은데, 이 주인이 나름대로 꾸며 놓은 소품들이 재미있었다. 팝아트적인 영화 포스터, 레코드 플레이어지만 블루투스 스피커, 숙소 방침이 쓰여 있는 레트로 타자기, 화려한 잡지들과 구석에 위치한 체스판까지. 적당히 뉴욕 소호와 프랑스 파리의 느낌을 섞어 놓은, 20세기의 분위기를 내려고 하는 21세기 패션 트렌드를 랜덤하게 배치한 인테리어였다. 디테일하게는 원색 계열의 쿠션과 색 바랜 나무색의 가구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모두 커다란 우림 속 나무 몇 그루의 불과할 뿐, 이 숙소의 매력은 숲 그 자체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영장에 있으면 건너편 산 꼭대기에 있는 붉은 벽돌의 성 뒤로 해가 넘어갔고, 그 앞엔 각각의 사선 모양을 한수십 개의 올리브 밭이 경관의 깊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끝도 없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어 늘 좋은 향기가 났다. 별장 주인은 작은 트레일러를 오피스 겸 바로 쓰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거의 숙소에 없었다. 틈만 나면 정원사와 함께 오픈카를 타고 시내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린 이곳에 있는 삼일동안 오직 우리 셋 뿐이었다.



근처 가까운 식당은 물론, 간단한 마켓도 전혀 없었기에, 우리는 시내에서 삼일 치 식재료를 장을 봐왔다. 프로슈토와, 치즈, 빵, 엔초비 절임과 올리브, 도넛피치와 수박 반쪽, 그리고 넉넉하게 6병짜리 맥주 투팩까지. 게다가 나는 피렌체 한인 마트에서 하나에 이천 원 하는 작은 컵라면도 두 개를 준비해 온 터라, 우린 크게 걱정이 없었다. 피렌체에서 구매한 인스턴트커피가 충분히 남아 있었고, 저녁은 외식을 할 예정이었다.


장을 보고 돌아와 나와 핌피는 선풍기 바람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잤고, 엠은 건너편 산의 붉은 성을 봐야겠다며 하이킹에 나섰다. 그리고 에메랄드 색 돌 하나와, 솔방울, 그리고 비어있는 붉은 성을 사서 우리의 별장으로 만들겠다는 미래 계획과 함께 돌아왔다.


다음 날 오전에 일어나자, 별장엔 아무도 없었고, 나는 잠옷 차림 그대로 일기장을 들고나가 잔디에 앉았다. 엠이 블랙 커피 한 잔을 내려 가져다 준다. 그 이후 우리 셋은 돌아가며 수영장을 오고 가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었으며, 근사한 저녁 외출 전까지 사실 서로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각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도시로부터 벗어나 오롯이 자연 속에 존재하는 기분은 우리를 편안한 침묵 속에서 부유하게 해주었다. 또한 여행 중반까지 쌓여온 여러 피로함을 풀어줄 터닝 포인트였다.



“천국이다. 그리고 난 한없이 우울하다. 내가 좀 더 건강했더라면 이 여행을 잘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여긴 정말 아름답다. 조용하고, 아무도 여기에 있지 않다. 바람이 잘 불고, 그럼에도 햇빛이 강렬하다. 냄새가 좋고, 엠은 내 옆에 앉아 내 무릎을 만지고 있다. 내 마음은 더 깊이 추락한다. 어떤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엠은 건너편 성에 하이킹 다녀온 이야기를 내게 해준다. 야생의 숲을 헤치고 나아가, 벌레들의 위협을 받으며, 도착한 그곳엔 구멍이 뚫린 지붕과, 크고 하얀 부엉이가 있었다. 올리브 농장이 앞으로 펼쳐져 있었고, 엠은 그곳에서 이상한 솔방울과 그린색 돌을 가져왔다. 그걸 싱크대에서 씻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모든 걸 기억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린다. 여긴 도마뱀이 많다. 7시 30분이 되면 종이 울릴 것이라고 한다. 위성 지도로 성과 그곳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엠을 보면서, 내가 과연 이 여행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사고하지 않고, 이렇게 설레어하지 않는데. 도대체 내 문제는 무엇일까. 애당초 여기까지 와서 내 문제만 파고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 볕 좋은 정원에 앉아 쓴 일기 중


내 마음은 불행했다. 그 사실이 원망스러워서 나 자신을 더 괴롭혔다. 붉은 성을 보며 꿈을 꾸는 엠과 제 일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떠올리며 난 최악을 겪고 있다 생각했다. 아름다운 절경 앞에서 향기로운 바람을 맞으며 우울과 절망을 외치고 있는 꼴. 비교와 자기 비하는 유럽이 멀다고, 산골이 깊숙하다고 따라오지 않는 게으름뱅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지독하게 나와 함께 있으려 했다. 나는 왜 순수하게 꿈을 꾸지 못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현실에 수긍하고 근면성실할 것이지, 이러지도 저러 지도 못한 채 더 많은 것을 바라고만 있는가. 그래서 밤중 문득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나는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너무 많은 창문들*. 세상의 사람들은 어떻게 제 삶을 다 살아내고 있던 것일까. 기억은 다시 널뛰어서 3일 전 피렌체로 돌아간다. 이탈리아 구시가지 건물들은 보통 4,5층의 높이다. 그리고 길쭉하게 생긴 창문이 줄줄이 열을 만든다. 나는 그것을 세어 보는 것이다. 연한 노란색 건물의 짙은 초록색 창틀을 왼쪽부터 세어가며 A와 B와 C를 생각한다. A는 열띤 구직 활동 후, 취업에 성공하여 현재 시차로썬 퇴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압구정의 오피스에서 ‘꿈’이라는 단어는 언급하지 않은 채, 오늘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B는 제 개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사람들 틈에 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애가 잔을 들고 한 마디를 시작하면, 시끄럽게 안주를 집어 먹던 사람들은 젓가락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그런 카리스마가 있다. C의 활기찬 눈동자가 숨이 죽은 그날 밤을 생각할 때쯤엔, 옆건물로 넘어간다. 연분홍색의 외벽에 칠이 벗겨진 파란색 창틀. C는 늘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믿는 친구였다. 그 애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그 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엔 더 많다는 것에 자주 슬퍼할 뿐이었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고층 건물의 빼곡하게, 때로는 창틀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유리창을 보고 있으면 수를 세기가 곤란할 때가 있다. 그래서 17시간을 날아와 여기 이탈리아까지 와서, 수화물에 챙겨 오지도 않았던 친구들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문을 보면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사람의 얼굴은 창문이라고 믿어 왔으니까. 그게 무엇의 창문이든.


7일 차, 정확히 여행의 중반부를 지나가는 이 시점. 나는 선택을 해야만 잠에 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앞으로 남은 일주일 동안 편안하게 이 순간을 즐길 것인지, 정말로 진심을 다해 감사해할 것인지, 그리고 내 안에 생기는 욕심들을 잠시 내려놓을 자신이 있는지.


곤히 자고 있는 엠의 손바닥을 들어 내 두 눈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온기를 공유하며 나 역시 잠에 빠져 들었다.


*유진목,재능이란 뭘까?』, 난다, 2025,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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