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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지미냐노 별장 (상)

1장

by 채리 김

나는 또 눈을 떴다. 적막. 도마뱀과 솔방울과 엠과 핌피, 모두가 자는 이탈리아 산골. 여태 잠 못 드는 영혼은 나 혼자일 것이다. 문득 바라는 게 너무 많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세어 본다. 첫날, 로마에서 알록달록한 창문의 수를 세었던 것처럼. 목이 긴 선풍기는 낡은 모양새로 돌아가고 있고, 엠의 말간 어깨를 어루만지며 다시 자려고 노력한다. 엠과 연애를 하며 생긴 습관이다.



새벽마다 들리던 핌피의 기침 소리가 멈췄다. 다행이다.


핌피는 멕시코시티에서 나고 자라, 현재는 텍사스에 살고 있는 엠의 외할머니다. 모두가 그녀를 Pimpi라고 부르길래, 나는 그게 멕시코 말로 ‘할머니’라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의 어릴 적 별명에서 기인한 호칭이었다. 연분홍색 꽃 Pimpinella가 그 시작이었는데, 너무 길어 자연스럽게 Pimpi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몇십 년간 잊고 지낸 별명이었는데, 첫 손주가 다시 그녀를 꽃송이로 만들었다. Grandma, Abuela 등 어떤 호칭도 발음하지 못하던 아기가 Pimpi라는 단어는 작은 혀에 딱 붙었는지 그때부터 마마, 파파보다 핌피를 더 많이 불렀다고 한다. 나머지 12명의 모든 손주들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핌피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 역시, 어쩌다 보니, 80세 넘은 노인을 어릴 적 별명-한국말로 치면, 철쭉, 장미 같은 것-으로 부르고 있는 것인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미국식으로 그녀의 실제 이름을 불러야 되었다면 더 난감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탈리아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핌피를 따라 엠과 내가 함께 여행길에 나섰다. 장거리 연애 중인 가난한 우리는 유럽에 가고 싶었다. 그때 마침, 핌피는 막내아들의 여름휴가지 스페인에 함께 갈 예정이었고, 그 후 이탈리아에 방문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엠이 그녀에게 여행 제안을 한 것이다. 외할머니가 스폰하고, 손자가 리드하는, 그리고 손자의 여자친구가 보필하는 모양새인 것.


핌피는 스페인에서 비행기를 타고 피렌체 공항에 도착한다. 이틀 먼저 로마에 도착해 있던 엠과 나는 핌피를 마중하러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넘어간다. 우리 셋은 그렇게 피렌체에서 6일가량 함께 여행하게 된다. 그러다 산 지미냐노라는 아주 산골 동네에서 서쪽 항구 도시 친께떼레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머물기로 한 것이다. 렌터카를 빌린 김에, 관광지가 아닌 이탈리아 시골을 맛볼 셈이었다. 현재 나는 산 지미냐노에 있는 이 멋진 별장에서 불면증으로 고생 중인 것이고.


이곳으로 오기 위해 피렌체부터 약 1시간을 달려왔다. 뒷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빈속으로 출발한 탓에 멀미를 심하게 했다. 사실 그게 정말 공복의 탓이었나 싶다. 이탈리아 고속도로 방지턱은 힘이 세다. 차 천장에 머리를 박을 정도로 튀어 오르거나, 내장끼리 서로 과격하게 부딪혀 갈비뼈가 아플 정도다. 하지만 로컬 운전자들과 도로를 달리다 보면, 강력한 방지턱에 차라리 감사해지는 지경이다. 또한 동네로 진입하다 보면 회전교차로, 즉 로터리가 정말 많다. 거의 각 도로의 진입구마다 한 개씩 있는 편인데, 동그란 회전에 몸이 기울어지며 GPS의 화살표가 빙그르 도는 걸 보고 있으면 멀미가 더 심해질 수밖에.


우린 거의 아무것도 없는 동네에서 페스츄리 집을 겨우 찾아 들어갔다. 빨간색 빈티지 담배 자판기가 입구에 놓여 있는, 앤틱 가구샵처럼 생긴 카페였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거의 딱 3시 직전이라 조마조마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3시부터 7시까지 모든 가게의 문을 닫고 낮잠을 자러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호주처럼 새벽 일찍부터 오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정오 직전에 장사를 시작하는 곳이 허다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딱 점심, 저녁 장사만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탈리아에 2주간 머물며 이 시에스타(낮잠) 루틴이 마음에 들었다. 점심을 먹고 할 게 없으니 숙소로 돌아와 더위를 식히며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잔다.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저녁 시간에 맞춰 다시 외식을 하러 나가는, 여행자 특유의 기시적인 부담이 없는 루틴.


나는 급하게 버섯치즈 루꼴라 샌드위치를 시켰다. 보통 첫끼에는 밀가루 빵을 피하는 편인데, 그럴 입맛 투정을 부릴 여력도 없이 한 조각을 해치웠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듯 아이스 카푸치노를 시켰지만, 뜨거운 카푸치노에 얼음 한 조각을 넣은 머그컵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의 맛은 좋았다. 나는 아주 드물게 샌드위치 한 조각을 더 시켜 먹었다. 빵 사이 거의 물러터질 만큼 구워진 양송이버섯이 정말 맛있었다. 울렁거리던 속이 많이 진정되었다. 우리는 얼른 가게 문을 닫고 낮잠을 자러 가고 싶은 주인을 위해 퇴장했다.



구불거리는 산길과 흙길의 경사로를 힘겹게 달려 도착한 우리의 별장. 키가 아주 큰 지중해 사이트러스 나무 다섯 그루가 성곽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별장 북쪽으로는 산과 올리브 밭 마을이 보이는 넓게 트인 경치가, 남쪽으로는 포도밭이 있었다. 우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트렁크에서 짐도 내리지 않고, 체크인을 하러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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