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 두꺼운 나무문을 힘껏 열었다. 내 모습이 보였다. 맑은 눈에 땀에 젖은 얼굴. 타일 대신 거울을 붙여 놓은 현관. 기울어진 탁자 위에 열쇠를 던진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땐, 방이 없는 줄 알았다. 현관문 기준 왼쪽으로 중간 크기의 거실이 있었는데, 그 어디에도 방 입구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나는 옛날 창틀을 떼어 거울로 꾸며놓은 독특한 인테리어를 방문으로 착각하였다. 그럼 무릎 높이의 저 창틀을 매일 넘어 다녀야 한단 말인가? 이탈리아 옛 건축은 참도 특이하다.
그러나 당연히 오른쪽으로 작은 복도가 나있었고, 그저 안쪽으로 열리는 현관문에 가려 나는 보지 못한 것이다. 종종 이렇게 발견하지 못한 성급한 상상으로 하루를 채운다. 기역자로 꺾어 들어가면 차례로 다용도실, 욕실, 작은방, 큰방이 있다. 작은방은 햇빛이 통하지 않아 어둡고 싱글 침대 하나에 나무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수도원 방 같았다. 반대로 안방은 널찍했으며, 창도 두 개가 있고, 퀸 사이즈 침대에, 화장대까지 있었다. 방구석에는 무릎 높이의 돌로 만든 싱크대가 있었다. 아마 옛날에는 여기가 빨래나 요리를 하던 공간이었나 보다. 우린 핌피에게 방 선택권을 주었지만, 그녀는 다음번에 자신이 큰 방을 쓰겠다며 흔쾌히 우리에게 안방을 내어주었다.
기억이 나는 것을 나열해 보기.
피렌체 동네 소식을 알려주는 얇은 잡지.
2인 소파에 올려진 정사각형 쿠션만 10개.
유명 디자이너의 모던 체어와 그 아류작들 4개가 식탁의자였고.
돌바닥.
누군가가 학교 숙제로 만든 것 같은 어설픈 작은 스툴.
옷장만큼 큰 고풍스러운 자주색 찬장.
부엌 싱크대에서 나오는 물만 식수용.
넷플릭스 로그인이 안 되는 텔레비전.
핌피가 틀어 놓은 이탈리아 국영 방송 혹은 미국 드라마 방영 채널. 한물간 형사물 -작전 중 사고로 죽은 피해자의 갓난아기를 돌보게 된 뉴욕 형사들! 이 아이를 둘러싼 커다란 음모에 휩싸이고 마는데…!- 이지만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드라마.
빨간색을 좋아하는 핌피는 빨간 머그잔을, 나와 엠은 파란색과 노란색을 번갈아 썼다.
이 숙소에 체크인한 첫날, 우리는 미국으로 치면 트레이드 조, 한국으로 치면 이마트(보단 작다) 같은 이탈리아 마트를 갔다. 기억에 남는 건, 입구 왼편으로 들어가자 캐셔가 우리를 막아 세우며 오른쪽으로 가라고 손짓하는 것이다. 그렇게 입장하자마자 펼쳐진 한 사람 정도 겨우 서있을 수 있는 좁고 긴 복도, 양옆으로 진열된 물건들. 그렇게 미로처럼 구불구불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과일, 정육, 치즈, 시리얼, 소스류, 생필품, 커피를 지나 마침내 도착한 곳은 주류 코너. 정중앙 관제탑처럼 쌓인 맥주 박스와 그 주위를 둘러싼 군대 같은 와인병들. 우린 마트 브랜드 인스턴트커피 믹스를 샀으며, 이 커피는 우리의 여행 마지막날까지 함께 다니게 된다.
피렌체에서 여행을 시작한다는 건, 다시 말해, 핌피와 1년 만에 다시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짐을 들어드리고, 영어로 최대한 존칭의 표현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모든 과정을 뜻한다. 핌피와 나는 재작년 추수감사절 자리에서 잠깐 마주친 뒤, 작년 여름 텍사스에수 두 번째로 만났다. 엠의 엄마와 나는 생일이 같아 뒤뜰에서 함께 합동 생일 파티를 했다. 가족 모두가 규칙처럼 선물을 생략했는데, 핌피만 내게 목걸이와 손 편지, 작은 파우치를 주었다. 그 감사함이 오래 남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자개 손거울을 보내드렸고, 핌피는 마음에 쏙 든다며 답장을 보내왔다.
숙소는 경사가 급한 계단을 3층이나 올라가야 했고, 그래서 귀갓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리 쫓아 올라가 현관 복도 불 스위치 켜기, 미리 찬 물을 빨간 머그잔에 담아 놓는 것이었다. 핌피는 말수가 적고, 이야기를 할 때 빼고는 특유의 똑같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기 때문에, 감정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도 말수는 적되, 리액션은 크고 밝게,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디테일하게 하지만 티가 나지 않는 선에 챙겨드리는 전략을 선택했다. 무언의 긴장감이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호감이 크다는 믿음 하나로 시작하는 여행이었다.
우린 짐을 푼 후, 한 블록 정도 걸으면 나오는 삼거리 코너 레스토랑을 갔다. 마찬가지로 시에스타 타임 30분 전에 갔기 때문에, 손님들은 거의 접시를 비웠고, 바텐더와 서버는 슬슬 정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우린 영문을 모르는 관광객 표정으로 가게에 입장했다. 사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들은 우리에게 테이블을 안내했고, 손으로 쓴 메뉴판을 주었다. 엠과 핌피는 밀레네사-한국의 돈가스와 같은 건데, 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나는 스테이크 샐러드를 시켰다.
공식적으로 이탈리아에서 함께 하는 첫 끼다. 핌피는 스페인에서 여기까지 오는 비행으로, 우린 로마에서 여기까지 온 기차여행으로 모두 피곤했기에 술을 마시지 않고 물 잔으로 짠-을 했다. 나중에 우리끼리 고급 와인을 한 병 따며 공유한 것인데, 한국어로는 짠-, 멕시코에서는 살룻 salut- 그리고 미국에서는 치어스 cheers이다. 이중 salut은 -위하여라는 뜻인데, 내가 재채기를 했을 때 핌피가 bless you 대신 salut 이라길래 어떤 의미냐 묻자 네 건강을 위하여라는 뜻이랬다. 개인적으로 신앙이 없는 나는 이 버전이 꽤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가 재채기를 했을 때 salut이라 말하면, 당신도 똑같이 salut이라 하면 된다.
또 하나, 이건 엠의 가족들이랑 술을 마시다 알게 된 건데, salut을 하며 잔을 부딪힐 때 서로 다 아이컨택을 하지 않으면 7년간 나쁜 섹스를 하게 된다는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미신이 있단다. 그래서 언제나 우린 잔을 부딪히며 서로 돌아가며 눈을 맞추는데, 엠의 부모님과 또렷하게 눈을 뜨고 맞출 때마다 '우리의 지속적인 좋은 섹스를 응원해줘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좀 어색하고 웃기다. 우리 모두 살룻- 눈 맞추기.
우리가 머무는 이 동네는 피렌체 중심지에서 강 건너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에, 꽤 조용하다. 나와 엠은 이 동네가 아직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지 않은 아트 디스트릭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개성 있는 젊은 손님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카페나, 바이닐 샵, 라이브 바, 빈티지 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골목으로 가기 딱 직전에 있는 이 레스토랑은 역사가 꽤 깊어 보였다. 만화에서 보던 배 나온 이탈리안 아저씨들이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를 가져와 메뉴를 휘갈겨 쓰며, 곳곳엔 코르크 마개가 올려져 있고, 주방은 화가 나지 않았지만, 싸우는 것처럼 대화하는 이탈리안 셰프들이 있다. 천장을 올려 다 보니, 다양한 종류의 바구니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멋있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