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정각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작은 해변 마을을 가득 채운다.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베르나차. 높은 산과 절벽이 해안가를 두르고 있어 매우 아름답다. 마을마저도 너무 작아 어딜 가든 5분 내로 도착이다. 중앙에 기차역이 있고 그곳을 기준으로 북쪽이 우리 숙소, 남쪽이 광장이다. 보통은 관광객들이 반나절 코스로 들렀다 가는 곳이지만 우리는 아예 5일간 숙소를 잡았다. 우린 한 지역에서 오래 머물며 그곳을 우리 동네처럼 만드는 여행을 좋아한다. 노을이 지면 관광객들은 마을을 떠난다. 그럼 아주 조용해지고, 하루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1. 나무다리
소방서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우리 숙소가 나온다. 건물은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곡 건너편에 건물이 지어져 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나무다리를 건널 때 계곡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 물은 그대로 아래로 계속 흘러 바다로 유입된다. 우린 다리를 건널 때마다 열쇠나 폰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다리 아래의 떨어진 물건을 살폈다. 누가 한 입 먹은 사과, 인형, 선크림, 레몬 껍질, 탄산수 병.
2. 우리 집
이번엔 핌피가 큰 방을 골랐다. 거실은 없고 작은 주방과 정원만이 있을 뿐이며, 우린 작은 방의 창문을 통해 정원 뒤편으로 갈 수 있었다. 싱글 침대 두 개에 모기장이 없는 방. 엠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제 침대를 내 쪽으로 밀어붙였고, 우리 사이 틈은 없다. 우린 습한 반지하 방에서 내내 끈적인 채로 붙어 있어야 했다. 그래도 불쾌지수는 0.
핌피는 도착하자마자 주방 테이블 위에 있던 책을 집어 든다. 베르나차에 관한 두꺼운 역사책이었다. 핌피는 숙소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어 본다. 피렌체에선 동네 소식지를, 산 지미냐노에선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명화집을, 그리고 여기선 이탈리아 원어 책까지. 그녀에겐 소셜 미디어 대신 책이 있다. 핌피가 책을 읽을 때는 나도 괜히 가져온 책을 뒤적인다. 아빠가 준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북소리> 절판본에서는 옛날 서울 냄새가 난다. 나는 그의 유럽 체류기를 읽으며 나의 유럽 여행을 문장화한다. 이탈리아어 듀오 링고 소리가 들린다. 핌피가 50일 연속 일수 달성에 성공한다.
3. 고양이와 해산물 스파게티
하루키의 말대로 이탈리아에는 게으른 고양이가 정말 많다. 숙소 앞에 사는 뚱뚱하고 느린 고양이에게 ‘마리오’라는 이탈리아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는 각국의 ‘철수’ 같은 이름으로 여행에서 만난 동물들에게 이름 붙여 주길 좋아한다. 멕시코에서 창에 부딪혀 우리가 간호해 준 작은 참새의 이름은 ‘알레한드로’였다.
마리오를 위해 투나캔을 사 오기로 마음 먹지만, 자꾸 까먹어서 미안하다. 그러나 이 동네 주민들이 돌아가며 먹이를 주는지 우리가 주지 못한 끼니 정도는 아쉬워하지도 않음. 자동차 아래 그늘에서 꾸벅꾸벅 조는 갈색과 흰색 털이 골고루 섞인 아이.
한편, 나 역시 배부르게 먹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항구 마을이라는 사실. 해산물 천지의 세상이라는 것. 나는 목표를 세웠다. 이곳에 있는 동안 모든 가게의 해산물 스파게티를 먹어볼 것이다. 내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메뉴는 해산물 스파게티다. 홍합이 이렇게 달콤한 음식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하지만 이틀 째부터 내 갑각류 알레르기 발동. 나는 파스타를 먹고 혀가 따가워서 집에 돌아와 알레르기 약을 먹고 잔다. 저녁 때는 조개만 들어간 봉골레 파스타를 먹는다. 다행히 어패류 알레르기는 없다.
또한, 매번 파스타를 약간 맵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이탈리아에는 매운 고춧가루 같은 건 없나 보다. 그러다 마지막 날, 핌피가 선물 가게에서 페퍼론치노 한 봉지를 사주며 다음번엔 이거 사서 챙겨 다니면서 직접 넣어 먹으라고 했다.
5. 기차역 아래 발바닥들
철교 위 베르나차 역은 승강장 바닥이 불투명하다. 우린 다리 아래를 지나며 매번 사람들의 발자국을 본다. 그건 어쩐지 으스스하면서도 귀엽다. 현지인은 계단 위에서 내려오는 손님을 마중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낑낑 내려오는 관광객들의 땀 흘리는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설렘과 반가움이 곁들여져 있다.
언젠가 마음이 우울할 땐 다리 아래 서서 승강장 바닥을 올려다보며 사람들의 발자국을 세어 본 적이 있다.
6. 집집마다 걸린 빨래와 비치 타월
주택가로 갈수록 더 많이 보이는 창가에 걸린 빨래들. 차를 타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새에도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속옷들. 수건들. 아기 옷, 혹은 흰색 빨래들. 정장 셔츠 혹은 원피스. 쨍한 햇빛에 바짝 말라가고 있는 빨래를 보며 그들의 삶을 상상한다. 허락된 관음. 가장 귀여운 건, 형형색색의 양말들. - 산 지미냐노에서 차를 타고 오며 한 생각. 그리고 이건 베르나차에 도착해서 새로운 그림으로 발전한다.
해안가의 필수품인 비치 타월은 가지각색, 다양한 패턴으로 창가에 걸려 있다. 베르나차 건물들의 창문 색은 짙은 녹색으로 같지만 창 밖으로 걸려 있는 타월 덕에, 각각의 집과 숙소를 상상하고 기억하기 수월하다.
7. 창문 밖을 바라보는 노인들
약 250명 정도가 사는 이 마을은 연령대가 높은 듯하다. 가끔 가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창문 밖 베란다로 나와 아래를 내려다보는 노인들이 있다. 자신의 마을 일 년을 살려 먹일 방문객을 보며 흐뭇한 걸까. 티브이를 켜지 않아도 되는 삶이다. 창 밖엔 주정뱅이와, 어린애들과 행복하거나 방금 싸운 커플이 뒤엉켜 마을을 즐기고 있으니까. 난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해서, 열심히 쳐다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관조적 시선들. 아이컨택이 불가능한 것. 그러나 편안하게 유랑하고 있는 것.
다음 이야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