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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차 조각들 (하)

7장

by 채리 김

8. 식당 서버들

이탈리아 사람들은 중간에 낮잠을 자서 그런지, 다들 일을 할 때 웃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유머를 잃지 않는 듯하다. 한 번은 우리가 계산을 하며 실수로 서버의 행로를 막은 적이 있다. 엠이 피해주려 양 쪽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그것이 서버와 엇갈리지 않아 둘은 마치 왈츠를 추는 듯했다. 양팔 가득 파스타 그릇을 두 개씩 든 서버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춤을 춘다. 표정은 살벌했다…


이곳은 야외 테이블이 정말 많은데, 한 식당은 좌석들이 식당 건너편에 있었다. 한 서버가 음식을 나른 후, 빈 손으로 식당으로 돌아가며 괜히 지나가는 관광객과 즐거운 시비를 주고받는다. 손님이 가득 차 힘들 만도 한데 저렇게 슬리퍼를 신고 넘어지지도 않으며 서빙을 하는 그들의 프로페셔널함에 놀란다.


9. 낚시 소년들

해안가를 따라 건물 외벽 아래 그늘이 져 있는 곳에 사람들이 쪼르르 앉아 있다. 볕이 너무 강해 날이 덥기 때문이다. 하루는 나도 구석에 앉아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는데 아홉 살 남짓한 소년 두 명이 지나갔다. 한 아이는 양동이를, 한 아이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우리 앞에 앉은 노인들 -한참 수다를 떨고 있던-에게 아는 척을 한다. 난 처음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밀려오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젖은 몸 차림의 아이들이 자기 친구를 부르듯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길래.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반갑게 부르며 그들이 들고 있는 양동이와 비닐봉지를 살펴봤다. 정어리였다. 아이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으로 잡은 물고기를 내보였고 다른 노인들은 아이들을 칭찬하며 예뻐했다. 할아버지는 손주가 자랑스러웠는지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가볍게 윙크를 하는데, 설레었다…


10. 디제잉 공연과 취기

아페롤수프릿츠. 이번 이탈리아의 여행은 이 칵테일의 이름으로 대신해도 되지 않을까. 질리도록 마셨다. 그저 표현일 뿐, 절대 질리지 않는 맛.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다. 쨍한 주황색. 햇빛이 투과되면 한 없이 예쁘고 달콤한 칵테일. 오렌지 한 조각을 띄워 주는데 나는 자주 엠의 것까지 뺏어 먹었다.


달달한 취기를 간직한 채, 바이닐 디제이 공연이 열리고 있는 광장으로 외출한다. 이 근처 모든 젊은 애들이 모였다. 낮부터 밤까지 춤을 췄다. 우린 세계 곳곳에서 모인 청춘들의 에너지에 감탄하며, 인파 속에서 겨우 맥주 네 캔을 구한다. 우린 조금 떨어진 해안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별과 파도를 보며 멀리서 들려오는 펑키한 하우스 음악에 둘만의 춤을 췄다. 여태까지의 우리 여행을 돌이켜 봤고 앞으로 또 가게 될 다음 여행지를 꿈꿨다. 누군가는 여행이 파티 그 자체라지만 우리에겐 여행은 여행이었다. 파티는 이런 밤에 가끔씩 즐겨 주기.


11. 미로 같은 길

엠은 트립어드바이저를 불신한다. 대신 하루 종일 위성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찾아낸다. 그게 무엇이든. 그렇게 홀로 하이킹을 가서 납골당을 찾아냈고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전망 좋은 바를 찾아냈다. 이곳으로 오는 길은 험난했지만 지중해 바람을 맞는 순간, 후들거리는 다리는 신이 난 점프를 했다.


그다음 식당 역시 해안 절벽에 위치했다. 핌피는 왔던 길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것이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엠은 장난꾸러기의 뒷모습을 하고 미로 같은 주택가 사이 터널 속으로 사라졌다. 우린 기다렸다. 이번엔 환희에 찬 소년의 표정을 하고 돌아오는 엠. 그가 찾은 지름길로 구불구불 걸어갔다. 마을 표면이 아닌 내부 구석까지 다 구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집집마다 딱 붙어 있고 무엇이 현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수상한 터널이 많았다. 우린 식당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12. 바람개비

펜스에 걸린 바람개비가 뱅글뱅글 돌아간다. 난 새삼 ‘바람개비’라는 단어가 귀엽다고 느낀다. 스페인어로 작은 바람개비는 ‘몰리니요 molinillo’라고 핌피가 알려 준다. 역시나 귀엽다. 영어로도 ‘작은’ 바람개비라는 단어가 있는지 궁금해 엠에게 묻는다. 그냥 ‘윈드밀 windmill’ 뿐이라고 한다. 그건 풍차처럼 거대한 이미지가 떠오르잖아! 내가 말하자, 엠은, 영어에는 딱히 귀여운 단어가 없어. “잉글리시 is not 귀여오.” 내가 알려준 한국말 중에 “사랑해.” “시팔.” 다음으로 엠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은 “귀여워.”


13. 보트 여행과 배를 닦는 노인

작은 항구에는 작은 보트들이 정박해 있다. 관광 시즌엔 선셋 투어 등을 운영하지만 사실은 고기잡이 배라고 한다.


뭍에서 아주 작고 꽉 끼는 수영복 팬티를 입고, 루돌프 코가 정수리에 달린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배를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다. 맨 몸으로 선박을 청소하는 광경은 처음 보았다. 내가 루돌프 코를 신기해하자 엠이 저건 낮은 선박 내부에서 머리를 자주 부딪히는 것에 쿠션 역할을 하는 것이라 알려주었다. 나는 그 빨간 공을 만져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 여태껏…

14. 마지막 날 일기

베르나차에서 마지막 밤. 드디어 이 축축한 반지하방에서 벗어났구나. 모기창도 선풍기도 없어서 찌는 듯한 더위에서 서로를 최소한으로 만져가며 사랑했다. 엠이 언젠가 내 일기는 자기의 자서전에 번역되어 실릴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본인 얘기가 엄청 많을 거기 때문에. 그나저나 짐을 싸는 시간이 난 좋다. 짐을 풀 땐 한없이 해이해지고, 체크아웃까지 내게 할당된 수건을 아껴 써야 하는데, 짐을 쌀 땐 청소를 깔끔히 하는 느낌에 수건을 마지막으로 마음껏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떠나는 자의 마음이 머물 자의 마음보다 가벼울 수 있구나. 어쨌든 엠은 내 앞에서 패션쇼를 하고 (엠은 가방을 싸며 옷을 갤 때마다 옷을 다시 입어본다…), 나는 장단을 맞춰주며 일기를 쓴다. 나는 이 작은 마을이 좋으면서도 싫다.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에 너무 힘들까 봐, 후회만 잔뜩 할 걸 알아서, 그게 무섭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내 인생인걸. 언제나 이렇게 복잡하게 굴러간다. 내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겠어 I can’t get out of my brain. 이게 결국 내가 할 수밖에 없던 이야기다. 엠이 지금 내 사진을 찍고 있어서 별소리를 다 쓰고 있다. 땀이 흐른다. 내가 돌아가서 여행기를 다 써낼 수 있을까 계속 걱정한다. 몰라, 쓰겠지. 못 쓰면 또 딴 거 쓰겠고. 이렇게 쓰다 보면 언젠가 어디에든 도착해 있지 않을까. 엠이 내가 글을 너무 많이 써서 작은 손가락들이 떨어져 나갈까 걱정이라 했다. 하지만 나처럼 전문 작가들은 금방 자랄 테니 괜찮을 거라고… 이상한 놈. 그러더니 내 펜을 빌려 자신이 주워 온 돌에 글씨를 써서 준다. ‘베르나차의 조각 A piece of Vernazza.’


떠나기 전 날 저녁, 마을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우리가 갔던 식당의 서버가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다. 슬리퍼를 신은 스텝이 현란하다. 페퍼론치노를 팔던 아주머니는 옷장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골라 입고 나온 듯하다. 배를 닦던 노인은 신랑신부와 건배를 한다. 물고기를 잡던 아이들은 사이즈가 맞지 않는 정장을 입고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그들을 구경하는 관광객 사이에 우리가 있다. 엠과 부딪힐 뻔한 서버가 아는 체를 하며 커피를 가져다준다. 여긴 이제 우리 동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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