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 me

2025.12.29

by 풀 그리고 숲

1

시간이 또 흘렀다. 많은 생각과 감정이 지나갔다. 지난 자리에 남은 것들은 찌꺼기일 수도 소금일 수도.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남은 것들이야말로 진짜일 것이다.

그리움과 사랑, 애틋함과 부드러운 희망.

또렷하고 선명할수록 왠지 표면이 거칠 것 같아서, 때로는 그것이 흐리더라도 부드러운 쪽을 택하련다.


2

아빠가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남편도 답을 모르는 눈치다.

무엇을 할 기력이 도무지 없어 가만히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기도 힘들어 요리를 했다.

우유 한 잔, 치즈 세 장, 그 위에 파마산 치즈를 듬뿍 부은 꾸덕한 스파게티는 제법 괜찮았다.

언제나 소음보다 고요를 택할 나인데, 좀처럼 마음에 힘이 나질 않아 영화를 틀었다.

불안하던 세포들이 제자리를 찾듯 잠시 잔잔한 감흥이 일었다.

헥터가 코코를 위한 노래를 부를 때, 눈물이 흘렀다.


3

지난 주말, 밀린 스토리보드 작업을 마친 후 여유가 찾아들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준이네에서 가족 파티를, 크리스마스에는 연희동 요가원에 갈 수 있었고,

급히 잡힌 재촬영 일정도 소화할 수 있었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의 야외 촬영이었다는 게 다소 불편했지만.


4

아직까지는 이분법적인 삶을 살고 있다.

눈물 흘릴 겨를 없이 바쁘거나, 눈물 흘릴 시간이 허락되는 여유를 갖거나.

여전하다. 조금의 시간만 주어지면 어김없이 그립다. 가끔은 눈물 없이 멍한 회상을 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그립고 너무 보고 싶은 걸.


5

참 이상하다. 엄마가, 아빠가 우리를, 나를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 확신하면서,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그 사랑을 확인하려 애쓴다. 그리고 안도한다.

맞아, 아낌없이 사랑해 주셨지.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지.

나는 여자고, 엄마니까, 아이를 사랑하다 보면 어느새 내 엄마의 마음을 경험한다. 그저 아는 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언제나 크나큰 위로이며 치료가 된다.

나는 남자가 아니고, 아빠가 아니니까, 아빠의 마음은 살짝 멀다. 그러나 실재하는 동안 온몸으로 느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6

뒤라스는 말했다. 대체로 그녀의 말 중, 공감되는 부분에 밑줄을 긋는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일정의 공감과 일부 새로움이 느껴져 줄을 그었고, 나는 여러 번 다시 읽었다.

"난 나를 평범하게 만들고 무참히 망가뜨리고 이어서 중요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짐을 내려놓기 위해 글을 쓴다. 텍스트가 내 자리를 차지해서 내가 덜 존재하도록."

그렇다면 나는 짐을 내려놓는 게 아닌 그 짐을 바라보고, 가다듬고, 정돈해서, 진열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나의 조각을 텍스트로 분리해서, 내가 좀 더 떨어져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다.


7

아이는 주말, 내 품에 안겨 말했다.

"엄마 좋아. 엄마 냄새 좋아."

"어떤 냄샌데?"

"엄마는 분홍 냄새야. 아빠는 파란 냄새야. 민형이는 노란 냄새야."

아마도 아기상어 가족들의 색에 따른 것이겠지만, 그 묘사가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나의 엄마는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나의 아빠는 은빛이 섞인 아주 옅은 하늘색의 냄새가 난다. 나는 그 냄새를 기억하고, 그 향은 손쓸 새 없이 나를 울게 한다.

아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냄새는 무슨 색, 무슨 냄새일까. 이따 물어봐야지.


8

요 며칠 내내 아빠 생각으로 울적해서, 괜히 아이에게 이야기했다.

"민형아, 전주 할아버지 안 보고 싶어?"

"전주 할아버지 보고 싶어."

"전주 할아버지도 민형이 보고 싶대. 아니, 그래서 보고 계신대."

"할아버지가 민형아~ 민형아~ 했어."

아빠의 생전 말투를 따라 하듯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아이. 불과 4개월 전만 해도 지금보다 말이 더뎠음에도, 듣는 귀는 더디지 않았음에 고맙다.


9

엄마의 죽음과 아빠의 죽음을 단순히 정리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고.

뭔지 모를 것들을 우선 아무렇게나 모아서 질서 없이 방치하고 싶지 않다.

이토록 아프고, 슬퍼도, 내내 똑바로 바라볼 테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이니까.

언젠가 아프고, 슬프지 않은 날이 온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을 거라 확신하며.

그러나 지금의 어설픈 내 모습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10

치즈 스파게티를 먹고, 코코를 보고, 시집과 연필을 주문하고, 고요를 피하려 해리포터를 라디오처럼 틀어두며, 감정과 생각을 꺼내어 본다.

이 감정들은 무어라 라벨링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무언지 알 때까지 마음과 몸에 간직하기에는, 힘이 들어 그냥 꺼냈다.

무지의 라벨지를 붙이기는 아쉬워 날짜만을 쓰고 붙인 채, 어느 서랍장에 밀어 넣어본다.


11

울적해하는 나를 두고 출근한 남편은, 코코를 같이 보았다면 좋았겠다며, 잠시 카페에 가서 책 읽고 오면 어떻겠냐 말한다.

아깐 책 읽을 마음도 안 들더니만, 읽고 싶어 졌다. 쓸 기력이 없다거나, 읽을 마음이 안 드는 건 분명한 적신호인데. 어쨌거나 다행이지. 오늘의 고비도 잘 흘려보내는 중.

업무 시트도 들여다볼 힘이 생겼다. 얼른 하고, 읽어야지. 냉장고에 배추를 오븐에 구워볼까.


12

쓰고, 읽고, 건강한 것을 먹고, 사유하며, 나를 아끼고 싶다.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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