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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장 May 03. 2018

막걸리 유랑기(1)

그 시절 그 맛을 찾아서

매일 밤 벌이는 술판도 모자라 지인들과 '시음 유랑단'을 꾸렸다. 주제는 어릴 적 맛보았던 막걸리를 찾아서! 무작정 오래된 양조장 세 곳을 찾아갔다.



술 익는 항아리, 지평양조장 

뒤돌아보면 20여 년 전만 해도 지방 소도시는 ‘술도가 천국’이었다. 우리 집도 바로 그 술도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심부름을 자주 했다. 술을 받는 동안 술밥을 주워 먹기도 하고 아저씨들과 이야기도 나누던 술도가는 그 시절 우리 형제들에게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이었고 놀이터였다. 어느 날 하굣길에 아버지에게 ‘혼쭐’이 나 울상 짓고 있는 남동생을 만났다. 술 심부름을 갔다가 자기도 모르게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댔는데 반이나 들이켰다는 것이다. 녀석은 종종 밀가루의 걸쭉함과 신선한 물이 만난 그 시절 막걸리 맛이 그립다고 얘기한다. 

요즘 유통되고 있는 막걸리들은 대부분 쌀 막걸리다. 가볍고 끝 맛이 개운하긴 하지만 고향의 맛과는 거리가 있어 좀 아쉽던 참이었다. 어느 날 쌀과 밀가루를 배합해 칼칼함을 담은 막걸리가 있다는 얘길 듣고 술친구들과 함께 양평으로 핸들을 꺾었다. 목적지는 한국전쟁 지평리 전투 당시 UN군 사령부로 쓰였다는 지평양조장. 천정이 높아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 내부에선 막걸리 병입 작업이 한창이었다. 몸살을 앓고 있던 김기환 부사장이 야윈 얼굴로 안내한 첫 번째 방은 고슬고슬하게 밥을 찌는 곳이었다. 대형 스테인리스스틸 솥에서 밀가루 익는 냄새가 솔솔 피어나던 그곳엔 밀가루와 쌀 포대, 삽과 싸리비, 선풍기 등 술도가의 일상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에 자리한 종국실의 문을 여니 이번엔 ‘사우나 냄새’가 후끈하게 풍겼다. 항균 효과가 있는 오동나무로 이루어진 이곳 온도계의 숫자는 31.1℃를 가리키고 있었다. 쌀과 밀가루에 백국균을 뿌려 막걸리를 발효시킬 효모를 배양하는 곳이 종국실. 이곳을 유지하기 위해 수십 년간 이곳에서 근무한 직원들은 아직도 번갈아가며 숙직한다고 했다. 같은 시간, 지하수로 바닥이 촉촉히 젖어 있던 술빚는 방엔 대형 항아리에서 보글보글 기포들이 끊고 있었다. 항아리에 귀를 대보려다 좀 멋쩍어서 술이 익어가는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중 “우리 어른들은 흙벽이 항아리와 함께 숨을 쉰다고들 해요.”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왕겨를 단열재로 벽에 가득 채우고 흙으로 마무리한 이 고택이 변함없이 막걸리를 생산해 온 힘은 공간이 주는 들숨과 날숨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과정을 거쳐 막걸리가 완성되기까지는 8, 9일가량 걸린다. 

가장 중요한 ‘생 지평막걸리’ 시식을 위해 근처 직영점에서 750ml 한 병에 1200원하는 막걸리 몇 병을 사 들고 길거리에서 파는 너비아니 구이와 한 잔 ‘걸쳤다’. 달착지근 한 첫맛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들어가니 탄산의 청량함이 목구멍을 간질인다. 밀가루 비율 덕분인지 적당히 담백하니 ‘옛날 맛’이 감도는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 속의 맛과 일치시키기는 어렵다. 감질나는 낮술의 일탈을 접고 본격적으로 맛집을 찾아나섰니 용문산 어귀에 손순두부집이 나타났다. 손 술과 손두부의 매칭이라, 옳거니 오늘은 저곳이다. 

지평주조 031-773-7030,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551-2번지



*<ELLE Korea> 2011.11에 게재된 컬럼의 재편집본입니다.



1 나이든 흙벽에 걸린 술도가의 일상적인 소품. 

2 ‘입국’한 균을 배양하는 종국실 풍경. 온도 유지와 관리에 가장 신경 쓰는 곳. 

3 지평양조장의 모든 제조 과정은 옛날식이지만 병입 작업만은 기계의 도움을 받는다. 

4 항아리에서 보글보글 익어가는 막걸리. 

5 흙벽과 숨쉬며 익어가는 막걸리 항아리들의 방. 지하수가 바닥을 촉촉히 적시고 있었다. 

6 원래 1.7ℓ짜리 큰 병이 오리지널이지만 몇 해 전부터 디자인을 바꾼 작은 병도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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