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사서함, 5

계절로 그려진 그림

by 빵도자기 장인

바람결이 스치면 그 뒷모습을 따라가고

햇빛이 되어 녹아내리는 눈송이들을 안아

나의 그림에 물방울을 흘려보낸다


생애 처음 본 선명한 물감들이

내 안에서 쌓이고 갈리고 서로를 덮으며

모든 계절을 만들어내더니

이내 탁하고 모호한 낙엽이 되어

흔적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새하얀 도화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온몸에 묻은 모든 것들을 털어내려 하지만

이미 일부가 되어 나를 이루고 있다

나지막하게, 더 이상은 못하겠어

빛을 마주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새로운 색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에 경탄하던 일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낙엽이 없지만

구운 밤색의 날카롭게 퍼석거리는 잎의 끝자락이

나를 보이지 않게 베어낸다

그들이 바람에 스칠 때마다 나를 베어낸다


엎어져 바닥에 누워있다가 해가 다 졌다

찬 공기와 따듯한 숨이 만나 따듯한 물 한잔이 되고

내 주위를 덮고 있던 낙엽들에 다시 물을 준다

그 여린 몸을 한 장 한 장 중요한 편지처럼 주워 모은다

떠나버린 것들을 한번 더 안아본다

내게 만들어진 선명한 계절을 안아본다

바스락거리는 가벼운 낙엽 속에서

숨소리를 들으며 풀려버린 실처럼 끝이 안 보이는

모든 주름들을 매만진다

행여 그 끝이 부서질까 조심히 다룬다

낙엽을 내 몸에 올리고 그 형체를 따라 그리며

나만의 계절을,

선명한 나의 선을 따라가 본다


다가오는 추위에 맞서

여기저기 떨어진 나의 낙엽들을

작은 부스러기 하나 놓칠까 예민하게 굴며

이불처럼 덮는다

바람을 막는 것은 아니지만

다가오는 무언가에 나를 보호해 주리라 믿으며


나를 이루는 모든 색깔을

아무것도 버릴 수가 없다


-낙엽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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