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이 Mar 16. 2023

6. 눈이 오지 않은 날을 더 사랑해

[눈이다. 눈이 온다] 그랜마 모지스

눈이 오지 않은 날을 더 사랑해



“이번 겨울은 눈이 참 많이도 온다.”


  엄마는 통화를 하며 올 겨울에 유독 눈이 많이 왔다고 말했다. 그렇구나, 라며 익숙할 만한 경험을 먼 타인의 것처럼 지나가게 되는 것은 내가 눈 내리는 풍경을 보지 못한 지 거의 2년 여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난 이제껏 대부분의 삶을 서울과 부천에서 보냈다. 때문에 겨울의 눈은 당연하고 때로는 지겨웠다. 물론 눈이 내리는 모습은 여지없이 아름답다.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얼굴로 내려앉는 낱알의 눈들은 차가우면서도 기쁨의 온도가 있으며 새하얘진 세상은 신의 축복을 받은 듯 순수한 감동을 준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봐온 눈이 매번 동일한 감동으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가령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 날의 등굣길에서 교복이 온전하게 제 모양새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교실로 들어가 온몸의 눈을 탈탈 털어내다가 시뻘게진 손을 친구들끼리 보여주며 하루를 시작해야 했고 눈이 그친 후엔 땡땡 얼어붙은 눈에 미끄러질까 긴장하며 걸어야 했으며 눈이 녹은 후엔 먼지와 섞여 회색으로 질펀해진 눈 속을 푹푹 밟으며 지나가야 했다. 더욱이 이십 대, 삼십 대가 되어가면서 눈에 대한 소위 ‘로망’이라는 것은 서서히 줄어들고 비와 맞먹는 조금은 성가신 날씨로 생각하기도 했다.  

  부산의 날씨는 겨울에도 영하권으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어 난 부산에 산 이래 패딩을 꺼내지 않았다. 물론 서울의 날씨에 익숙한 나로서는 부산의 겨울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포근한 겨울이기에 부산에 내려와 눈을 내리는 풍경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조차 아예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아쉬워지는 것이다. 친구들의 SNS 속엔 눈이 내리는 모습, 눈오리, 눈싸움 등의 갖가지 사진들이 올라왔다.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며 새삼 눈이 내리는 날에 대한 기쁨과 행복이 떠올랐다. 뽀득뽀득한 소리를 내며 밟히는 새하얀 눈, 가족과 만들었던 눈사람, 세차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순간들, 강아지와 산책하며 남긴 발자국. 그 모든 시간들은 눈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추억들이다. 더욱이 sns 속 가장 눈에 띄는 이미지는 친구와 친구의 아이들이 눈을 밟으며 놀고 창문밖에 내리는 눈을 감상하는 이미지였다.

난 내 딸에게 언제쯤 이런 순간들을 선사해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마도 이따금 겨울철에 친정부모님을 뵈러 가는 일이 아니라면 눈을 마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직접 눈을 보고 만지는 경험은 한참 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난 내 아기의 방에 눈이 내리는 풍경을 두기로 했다. 그랜마 모지스의 눈 오는 풍경을 다룬 여러 그림들 중 <눈이다. 눈이 온다>는 눈이 내리는 날 사람들의 일상적인 즐거움을 담은 듯하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 눈썰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는 아이들, 눈 속에서 걸어가는 마차와 그 뒤에 매달린 아이의 썰매 등 그림을 보고 있자면 눈이라는 존재가 주는 소소하지만 근사한 기쁨이 전해지는 듯하다.

<눈이다. 눈이 온다.> 그랜마 모지스, 1951



  난 아기의 방에서 이 그림을 보며 딸에게 전해줄 이야기들을 생각한다. 그 이야기들 중엔 딸에게 꼭 전해주고픈 이야기가 있다.

아기가 1월생이라 내가 만삭일 땐 한겨울의 눈이 자주 내리던 기간이었다. 그 겨울에는 여느 때보다 자주 폭설이 내려 사고도 많았고 폭설에 갇혀 차가 꿈쩍도 못하더라는 뉴스도 잦았다. 더욱이 폭설로 인해 구급차에서 아기를 출산하거나 응급실을 가지 못해 아기가 위험해졌다는 뉴스까지 보도되다 보니 만삭의 나는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아기가 문을 두드릴까, 꽤나 노심초사했었다. 다행히 눈이 내리지 않은 새해의 첫날 아기가 태어났고 난 산후조리원에서 그 겨울의 남은 눈을 바라봤다. 난 여전히 그때를 추억하며 아기의 탄생에 눈이 내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만일 딸아이가 눈 내리는 풍경을 아쉬워할 만큼 자라게 되면 난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태어난 날을 생각하면 눈이 내리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전혀 아쉬울 것이 없다고. 눈이 내리지 않았기에 너와 내가 무사히, 마음 한편 편안히 만날 수 있었다고.


그렇기에 나는 널 안을 수 있었던 눈이 내리지 않은 날을 더 사랑한다고.

이전 05화 5. 인연의 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