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한 애도

허상에 머물러

by 김채이





오늘도 내 차례는 10분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20분씩 피드백을 받는데, 나는 절반에도 못 미쳤다. 선생은 붉은 펜을 손끝으로 튕기듯 내 그림 위에 대충 선을 긋고 말했다.

“힘이 없다.”

“이제까지 뭐 했냐.”


선생의 시선은 이미 합격할 얼굴들 쪽에 머물러 있었다. 내 자리엔 10분만 던져주고, 곧장 다른 학생의 20분으로 넘어갔다. 그 시선의 무게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탁탁탁, 연필이 석고상을 긁는 것 같았다. 한때는 선생의 눈빛조차 닮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향해 날아드는 펜촉같이 느껴졌다.

두 달 뒤면 실기시험. 이제 이 10분조차 줄어들겠지,

손가락 끝이 연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학원 복도에는 매주 합격자 명단이 붙었다. 누군가는 이름을 찾고 환호했고, 누군가는 종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에 서 있는 건 늘 나였다. 이름은 없었지만, 그 종이에 적히지 않은 것들까지 나를 압박했다. 떨어진 이들의 얼굴, 부모가 지불한 수강료, 강사가 건네는 짧은 한마디. 모든 것이 ‘투자할 가치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가르는 잣대처럼 느껴졌다.


집에 오니 옅은 하늘색의 이불에서 알맹이의 내음이 느껴졌다. 열 살 된 알맹이가 터덜터덜 내게 다가왔다. 알맹이의 십 년은 나의 십 년보다 훨씬 빠르게 흘렀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그는 나보다 먼저 늙어 있었다. 알맹이는 내 곁에 고개를 얹었다. 그의 숨소리는 낮고 규칙적이다. 그 순간만큼은 방 안의 공기가 잠시 안정되는 것 같았다.


‘너 같은 걸 누가 좋아하겠냐.’


엄마의 말은 종종 불시에 떠올랐다. 쿡 찌르고 달아났다가 금세 다시 돌아왔다. 나는 알맹이의 따뜻한 무게에 대고 중얼거렸다.

“엄마가 틀렸어.”

엄마는 가끔 내 스케치북을 빼앗아 검은 펜으로 긋곤 했다. 엄마는 신경질과 피로 속에서 살아갔고 아빠는 늘 무기력했다. 난 그럴 때마다 그저 우두커니 그림에 검은 선이 연속하여 날아드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심연이었다. 난 그 검은 잉크에 점점 형체를 잃어가는 내 그림들이 깊고 캄캄한 심연으로 빠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들을 난 다시는 건져낼 수 없을 것이었다.

난 마음 깊은 곳에 내 그림자를 그렸다. 엄마가 하는 말은 다 그 그림자를 향한 것이라고 스스로 세뇌했다. 하지만 엄마가 말하는 존재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 내 어린 시간들을 지배했고, 난 그림자를 넘어설 만큼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나를 붙잡아주는 건 진영이었다. 학원에서 만난 그는 늘 “우리”라는 단어로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수업 후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역에서 짧은 포옹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런데 요즘, 그의 자리가 자주 비어있었다. 연락이 뜸해졌고, 표정은 깊게 접힌 그림자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날, 깊게 구겨진 얼굴에서 낯선 냄새가 스쳤다. 원래 피우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의 스케치북에는 선이 흐릿하게 멈춘 채로 남아 있었다. 그 선은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은 것처럼 종이 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뭔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지만 묻지 못했다.

그날 그는 전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후배들이 하나둘 합격하는데, 나는 아직 여기 있네.”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눈빛은 가라앉고 있었다. 집에서도 이제 그만두라는 말이 잦아졌다고 했다. 그는 연필을 내려놓고 옅은 선으로 가득한 스케치북을 오래 바라봤다.

합격한 친구들은 실기실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들었다. 그 웃음소리 뒤편에서 진영의 스케치북은 여전히 마지막 장에서 멈춰 있었다. 연필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종이 위엔 지워진 선만 얼룩처럼 남았다. 결과는 점수로만 남았다. 숫자에서 이름이 빠질 때마다, 그림이 아니라 사람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진영은 그 공백 속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나 또한 같은 자리에서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한때 나도 진영도, 열심히 한만큼 결과가 돌아올 거라고 믿은 적이 있었다.

“나도 이젠 좀 힘든 것 같아, 내 그림은 뒷전이야.”

내 말에 진영의 눈빛이 탁해졌다.


역으로 걸어가며 그는 내 손을 잡았다. 내 손은 쉽게 차가워지지만 진영의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맞잡은 손의 온기에 난 저녁바람조차 덜 차갑게 느껴졌다. 지하철 전광판을 바라보던 진영의 짧은 말이 공기 속에 머물렀다.


“미안해.”


나는 ‘왜?’라고 묻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는 끝내 대답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로 그의 눈길은 허공에만 머물렀다. 작은 떨림이 그의 손끝에서 전해졌다.


며칠 뒤, 학원에서 진영이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의 남겨진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가 쓰던 스케치북을 오래 바라봤다.

찢긴 종이, 멈춘 드로잉, 그리고 검은색으로 덮인 마지막 장.’

그제야 모든 낯섦이 이어졌다.


그리고 소식이 전해졌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한동안의 이야기들이 파편처럼 떨어졌다. 난 그 속에서 겨우 파편 몇 조각을 주워 들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진영은 결국 멈췄다.


방 안 의자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책상 위엔 스케치들과 문제집들이 뒤엉켜있었다. 이룬 것 없이 쌓이기만 한 뭉텅이들이었다.

입시만 끝나면,

진영의 눈길이 떠올랐다. 허공을 바라보던 그 시선은 여전히 어딘가에 걸려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분명하다고 믿었는데, 믿음은 소리 없이 무너졌다.

홀로 남겨진 것의 주위를 둘러봤다. 어둡고 황량했다. 서늘한 공기에 입술이 떨려왔다. 가슴속 깊은 곳의 그림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왔다.

“나 같은 걸 누가…”

나는 가방에서 검은 펜을 꺼냈다. 주저하지 않았다.

스케치북을 펼치자 이내 검은 선이 종이를 갈가리 찢어 내듯 날아들었다.

품고 있던 컴컴한 그림자가 결국 나를 덮쳤다.


“엄마가 틀렸어! 엄마가 틀렸어!”


내 외침은 적막 속에 삼켜졌다.

종이에 스며든 잉크냄새만이 환청처럼 내 귀에 울렸다.

형체를 잃어가는 내 결과물들.

그것들은 깊고 캄캄한 심연으로 빠지고 있었다.

검은 심연 속으로 빠져 다시는 건져낼 수 없을 것이었다.



본 글의 인물과 사건들은 자전적 경험에서 출발했으나, 여러 파편을 엮어낸 창작소설임을 밝힙니다.




검은 선은 한 사람의 외침이었지만,

동시에 우리가 지닌 기억의 무늬이기도 했다.

사라진 목소리를 대신해 남겨진 것은,

종이에 새겨진 검은 흔적.

나는 그 선을 따라가며 나의 과거를 보았다.

나를 위한 위로이자 당신을 향한 애도를 남긴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