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의 산책길

정해진 길을 벗어나

by 김채이





힘겹게 침대에 몸을 뉘었다. 배를 움켜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콕콕 찌르는 통증은 싸하게 풀리기를 반복했다. 이번엔 지난번보다 더 심한 듯했다. 주현은 몸을 웅크린 채 곰인형을 끌어안았다. 오빠는 아직도 인형을 안고 자냐고 놀리곤 했지만, 주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뭔 상관이야.


오늘은 기말고사가 끝난 날이었다. 친구들은 파티에 갔지만, 주현은 늘 시험이 끝나면 이렇게 침대에 웅크려 있어야 했다. 콕콕 찌르는 통증은 익숙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건 배가 아니라 마음 쪽에서 나는 통증 같았다.밤새워 공부해 얻은 점수였지만 “찍었는데 맞았어”라는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1등이라는 자리는 성취의 기쁨을 주면서도, 끝없는 압박으로 몸에 생채기를 냈다.

“넌 일등이잖아.”

그 한마디는 주현의 모든 애씀을 지워버렸다. 선생님께 혼이 나도, 문제를 틀려서 속상해도, 이렇게 아픈 배를 움켜잡아도 일등이기에 그저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오빠도 이랬을까.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던 방문 틈의 불빛이 떠올랐다. 우등생이었던 오빠는 자사고에 갔지만, 그곳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주현은 일반고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 선택에도 또 다른 무게가 있었다.


“일반고는 자사고보단 할 만하잖아?”


부모님의 기대와 오빠의 말. 주현은 또 다른 짐을 짊어진 채 입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성적만으론 부족했다. 완벽함을 원하는 입시. 주현은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자 성격도 좋은 리더여야 했다. 일등이 된 이상 밀려나서도 안 됐다. 밀려나는 순간, 주현의 호칭인 일등은 이등이 될 게 뻔했다. 그렇게 불릴 바에야 배가 아프고 답답한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겨울방학, 주현은 요양원 봉사를 택했다. 스펙을 위해서였다. 요양원 복도에는 약 냄새와 죽 냄새가 엷게 섞여 있었다. 창문 밖엔 바람이 들락거렸고, 커튼이 느리게 흔들렸다.

생활은 정해진 루틴 그대로였다.

식사, 양치, 옷 갈아입히기, 산책.

첫날은 몸이 피로해 얼떨떨했고, 둘째날엔 양치를 도와드리다 비위가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현은 피곤에 지친 눈꺼풀을 비비며 그래도 묵묵히 순서를 지켰다. 늘 단정하게 동작을 반복하는 모습은 교과서 속 모범생 같았다.


그렇게 이틀을 보낸 마지막 날,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멀리 가리켰다.

“저기는 뭐 하는 곳이여?”


노란색의 큰 건물, 영어로 적힌 간판과 커다랗게 걸린 광고현수막들. 그리고 북적이는 사람들.

대형마트였다.


“내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주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매일 같은 길과 같은 시간을 반복해온 듯, 얼굴에 묻은 무료함과 피로가 보였다. 마치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순간 할머니와 자신이 겹쳐보였다.


정해진 길은 요양원 울타리를 따라 돌아가는 것이었다. 앞서 걷는 봉사자들도 아무렇지 않게 코스를 이어갔다. 발끝이 바닥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휠체어 손잡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미세한 삐걱임이 났다.


건너면 안 되지. 정해진 코스가 있는데…

괜히 혼나면? 시간만 낭비하면?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속삭였다. 늘 지켜야 한다고 배워온 규칙,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 하지만 이내 할머니의 눈빛은 낯선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주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해진 길을 벗어났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심장이 그 바람을 따라 뛰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래 지켜온 틀을 조심스레 깨뜨린 듯했다.


마트 안에서 할머니의 눈빛은 더 밝게 빛났다. 모자를 씌워드리고 시식 음식을 건네자 할머니는 아이처럼 웃었다.


“맨날 티브이로만 봤던 건데…”


짧은 이탈의 시간.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무언의 성취였다. 돌아오는 길, 할머니는 주현의 손을 꼭 잡고 몇 번이나 말했다.


“고맙다.”


찬 기운에 볼이 발그레한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와 눈물이 함께 번져있었다. 주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 눈물을 담아두었다.


이제 고3이 된 주현은 다시 통증 속에 휘청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면 다시 요양원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 기억은 숫자가 아닌 마음의 무게로 오래 머물렀다.

주현은 알았다.

자신을 지탱해 주는 건 성적표가 아니라는 걸.

누군가의 미소, 그 손의 온도, 흔들리지 않는 위안.

그건 숫자로는 셀 수 없는, 아주 작은 마음의 성적이었다.



본 글의 인물과 사건들은 자전적 경험에서 출발했으나, 여러 파편을 엮어낸 창작소설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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