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너머 이해
무심코, 그저 보였을 뿐이었다.
나래는 선생님의 호명을 듣고 일어섰다. 교탁 앞으로 나가며 습관처럼 교복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사소한 동작조차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였다. 앞에 서자 선생님께서는 점수가 나열된 표의 한 부분을 가리키셨다. 나래의 점수였다. 98점. 아깝게 한 문제에서 실수를 한 탓이었다. 나래는 큰 눈을 꿈뻑이며 끄덕였다. 그런데 눈에 뜨이는 두 숫자는 따로 있었다. 26.
26점이라고,
본인의 점수보다 더 크게 눈에 박히는 숫자에 나래는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누구의 점수인지 알 것 같았다.
교실 안 공기는 흔들리고 있었다. 숫자 하나가 아이들의 시선을 옮겨놓고, 누군가는 속삭임을 흘리고, 누군가는 고개를 떨궜다. 선생님이 가리키는 점수들은 그저 숫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리거나, 또 다른 누군가의 숨을 한순간에 꺾어놓는 못 같았다.
무심코 보게 된 숫자와 함께 자리로 향하며 나래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한 명에게 향했다.
윤아였다.
평소 영어를 잘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영어시험을 본 날, 쉬는 시간에 본 윤아의 시험지는 문제마다 엉킨 듯한 오답 표시들이 빼곡했고, 남은 빈칸은 절반을 잠식하고 있었다. 윤아는 답을 맞히는 친구들의 시험지와 자신의 시험지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시험지를 가방 속에 넣었다. 안 그래도 짧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잔뜩 머쓱하고 어색한 그 웃음은 나래에게만 닿은 듯했다.
나래는 속으로 놀라면서도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 연민 같기도, 위안 같기도 한 감정.
그래도 이번엔 좀 쉬웠는데,
순간 피어오른 작은 우월감이 나래의 마음을 스스로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쉽다 투덜대던 내가, 윤아 앞에서는 얼마나 여유로워 보일까.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래는 오늘 확인한 영어 점수를 떠올렸다. 나래는 영어에 자신이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기도 했다. 그만큼 한문제라도 틀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며 만족스럽지 않았다.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도 백 점이었을 텐데,
늘 반에서 상위권이었지만 마음이 놓인 적은 없었다. 학원은커녕 문제집 한 권 사는 것도 눈치 봐야 하는 집안 사정, 낡아 손때가 까맣게 밴 단어장을 붙들고 외우는 현실. 자신보다 더 일찍 마트로 일을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나래의 불안을 더 키웠다.
엄마에게 칭찬 한마디 받고 싶었지만, 늘 바쁘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때 옆에서 윤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래야, 넌 좋겠다. 공부 잘해서.”
윤아의 웃음은 늘 그렇듯 해맑았지만, 나래의 눈엔 이상하게도 그 미소 뒤에 가려진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뭐, 이번엔 그냥 운이 없었던 거지. 너도 다음번엔 잘할 거야.”
위로였을까. 하지만 나래는 알고 있었다. 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윤아는 영어를 못한다. 지난번 영어수업 때, 돌아가며 문장을 읽던 중 toothpaste를 ‘투스파스테’라고 읽는 바람에 친구들이 모두 시시덕거렸던 기억이 스쳤다. 그때도 여전히 윤아는 배시시 웃었지만, 친구들은 그 웃음을 더 짓궂게 놀릴 뿐이었다.
“중딩들도 그렇게 안 읽어.”
윤아는 그 한마디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래도 웃었다. 윤아는 그런 아이였다. 작고 귀엽고 순하고, 착하고, 놀려도 배시시 웃는 아이. 친구들에게 배려심이 넘치지만 정작 친구들은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아이. 그럼에도 감수하는 아이.
나래는 가끔 윤아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답답하기도 했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친구들에게 자기 목소리도 냈으면 했다. 하지만 나래도 내심, 본인조차 윤아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윤아야, 다음엔 같이 공부할래? 집에서 해도 되고 도서관에서 해도 되고.”
“아, 도서관이 좋을 것 같아. 같이 하자. 응.”
나래는 윤아를 도와주고 싶었다. 어차피 윤아를 도와줘도 자신보다 점수가 높진 않을 테니, 놀림을 받지 않을 정도까지만 도와줘도 나래는 친구로서 제 몫을 다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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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도서관 열람실은 이미 자리를 잡은 학생들로 붐볐다. 시험기간의 긴장감이 열람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펜 끝들이 종이 위에서 일제히 움직이는 소리, 책장을 넘지는 바스락 거림이 한데 뒤섞였다. 나래는 윤아와 나란히 앉아 ‘이 부분을 먼저 외워봐’라고 말한 뒤 자신도 영어 지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십여 분 후, 짤막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힐끗 보니 윤아의 얼굴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래는 이미 한 단락을 다 외웠는데, 윤아의 펜은 세 번째 줄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윤아야, 어려우면 단어부터 시작해 봐.”
나래는 속삭이며 단어 페이지로 넘겨 보여주었다. 그날 윤아는 단어 암기로 두 시간을 채웠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된 건가. 윤아가 단어는 다 외웠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래는 나름 뿌듯했다.
하지만 며칠을 함께 공부한 어느 날, 윤아는 여전히 본문 한 페이지도 제대로 못 외우고 있었다. 나래는 시계를 한 번 보고 다시 책을 보았다. 윤아의 책장 넘기는 손길은 한없이 느리고 가벼웠다
이 속도로는 도저히 시험 범위를 끝낼 수 없어,
답답함이 목구멍이에 차올랐다. 윤아의 펜 끝은 잉크조차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래는 펜을 내려놓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얘 어떡하지,
나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시곗바늘은 시험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는데, 윤아의 속도는 늘 제자리였다. 그 순간, 나래는 자신이 더 앞서 있다는 사실에서 묘한 위안을 느꼈다. 그 위안이 우월감인지 죄책감인지, 스스로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며 나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윤아야. 근데 이러다 시험 범위까지 다 하지도 못하겠어.”
“괜찮아. 다 못하면 어쩔 수 없지 뭐.”
나래는 윤아의 대답에 놀란 척하며 바라봤다. 허물없이 웃는 그 얼굴이 순간 바보처럼 느껴졌다. 다 못하면 어쩔 수 없다니. 어떻게든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나래는 윤아가 한심했다.
“윤아야, 정신 차려. 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엄마한테라도 도와달라고 하던지.”
윤아의 걸음이 멈췄다. 나래가 돌아보니 윤아의 시선은 발끝에 박혀 있었다. 문득, 윤아의 가방이 몸집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교복 치맛자락이 작은 바람에 흔들렸다가 다시 멈췄다. 나래는 무 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그리고 윤아가 고개를 들었다.
“못 도와줘.”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서둘러 먼저 돌아갔다. 나래는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왜 그렇게까지 돌아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도와줌이 마치 나를 더 높은 데 세워두는 것 같아, 스스로도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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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교실로 들어서자 먼저 앉아 있는 윤아가 보였다. 조금 쭈뼛대다 다가와 말했다.
“나래야, 저번엔 미안했어.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공부할래?”
윤아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집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던 윤아였기에 놀라웠지만, 동시에 궁금했다.
좋아. 나래는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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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윤아가 나래를 집으로 초대했다.
윤아의 집은 오래된 빌라 3층에 있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거실, 낡은 벽지는 군데군데 색이 바랬지만, 손길이 닿은 흔적으로 반짝이는 깨끗함이 있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집 안을 은근히 덮고 있었다.
현관 앞에는 윤아의 엄마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작고 왜소한 체구였지만, 얼굴선은 야무졌고 안경 너머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어서 와요. 윤아 친구.”
발음은 어눌했지만, 말끝이 부드럽게 올라가 낯설지 않았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집안의 공기를 차분히 눌러주는 힘이 있었다.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는 동안, 무릎을 꿇고 앉은 엄마는 옆에 둔 작은 수첩에 자꾸 무언가를 메모했다. 한글 옆에 가타카나를 덧붙이며 ‘단어 외우기’, ‘소리 내어 읽기’ 같은 공부법들을 적어 내려갔다. 뜻은 서툴렀지만, 글자마다 나름의 간절함이 맺혀있는 듯했다. 옆에서 윤아가 가끔 통역하듯 말을 보탰고, 그 모습에서 나래는 그제야 알았다. 윤아가 왜 영어 앞에서 작아졌는지, 왜 집에서 공부하는 걸 꺼렸는지.
나래는 늘 윤아를 못한다고 여겼다. 내 도움 없인 안 된다고, 그래서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엄마는, 어눌한 말투에도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애쓰고 있었다. 윤아가 내뱉었던 ‘못 도와줘’라는 말의 무게가 이제야 가슴에 박혔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이 품었던 작은 우월감이 부끄럽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윤아는 언제나처럼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래야, 와줘서 고마워.”
그 웃음엔 어떤 꾸밈도 없었다. 함께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에 가만히 퍼졌다. 시험 점수와 비교가 아닌, 같은 식탁 위에서 웃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점수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건 성적이 아니었다.
나래는 그제야 알았다.
윤아에게는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걸.
누구에게는 26점이 전부일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함께 걸으면,
그 점수도 언젠가 80점이 된다.
성적보다 더 오래 남는 건,
서로를 믿어준 시간과 웃음이다.
지금도 묵묵히 나아가는 네가 자랑스럽다.
너의 웃음과 삶이 앞으로도 반짝이길 진심으로 응원해.
서툰 걸음이 너를 원하는 길로 데려갔듯,
너의 앞날도 언제나 고운 걸음으로 이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