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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감성 Feb 08. 2020

아무도 없는 할머니 집 앞에서

커버린 건 너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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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가로 가 수도꼭지를 틀면 파란색 호스 끝에선 물이 콸콸 쏟아졌다. 긴 호스의 끝을 누르면 물이 두 갈래로 멀리 뻗어나갔는데 우리는 그 물줄기로 무지개다리를 만들었다. 그 아래를 왔다갔다하며 정신없이 놀다 보면 옷은 흠뻑 젖어버리곤 했지. 그때는 몰랐던 여름날의 무더위, 우리는 우리가 뿌린 물로 이슬이 맺힌 잔디밭 위를 세상 걱정 없이 뛰어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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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쪽에는 큰 대추나무가 있다. 가을이었는지, 대추가 익어 떨어질 때 즈음 큰아빠는 나무 위로 올라가 가지를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곤 했는데, 그건 대추가 떨어질 때 내는 후두둑 소리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큰아빠가 나무에서 내려오면 쪼르륵 나무 밑으로 가 대추 알을 하나 주워 탈탈 먼지를 털어내 입안에 쏙 넣었다. 아삭아삭. 아직까지 과자를 좋아하는 초딩입맛이지만, 그때 먹었던 대추는 참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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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날, 할머니네와 가까운 곳에 있던 큰할머니네 세배를 하고 돌아오던 길. 무지 추운 날이었던지 집집마다 커다란 고드름이 땅끝까지 내려와 있었고, 사촌형들은 그중 큰 고드름을 하나 떼 내게 쥐어줬다. 나는 자랑하고 싶어서인지, 아님 별 생각이 없었는지 그 고드름을 들고 거실까지 들어왔는데 하필 손이 미끄러져버렸다. 큰 고드름이 거실 바닥에 떨어져 와자작 산산조각이 났는데, 할아버지는 이제껏 내가 들은 적 없는 큰소리로 나를 혼내셨다. 어릴 적, 아프신 할아버지가 누워계셨던 모습만 익숙했는데... 아무튼 그땐 나는 심각했고 혼자 주섬주섬 고드름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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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낮잠을 잘 때, 코가 너무 막혀 킁킁댔다. 할머니, 코가 너무 막혀. 옆에 함께 누워있던 할머니는 그런 나를 멀긋이 보시더니, 그러면 한 번 반대쪽으로 돌아누워봐라. 그랬더니 한쪽이 잠시 뚫리는가~ 싶더니, 반대쪽이 막혀버렸다. 이리저리, 이불을 뒤척뒤척, 할머니 옆에서 그렇게 한참을 뒹굴거리다 잠에 들었는지... 할머니가 무어라 이야기했는지, 그때 내가 얼마나 어렸는지, 계절은 어땠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때 할머니 옆에서 맡았던 그 집의 냄새, 할머니의 냄새가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그렇게 코가 막혔었는데.



 내 키보다 훨씬 컸던 돌담을, 이제는 내려다보며 집을 바라봤다. 


집 앞엔 큰 빌딩이 들어서고 근처 시골 여관은 세련된 모텔로 바뀌었지만, 어떻게 할머니집만은 그대로 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물이 콸콸 쏟아질 거 같은 수돗가도, 커다란 대추나무도. 먼지 쌓인 지하실과 깨진 창문만이 시간이 흘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본 그 집에, 예전의 그때처럼 뛰어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음에, 나는 사진만 한 장 찍어놓기로 한다. 

 끼이익 소리 나는 쇠문을 열고 수돗가를 지나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얼굴이, 그 손길이, 그 따뜻한 마음이 날 반겨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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