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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감성 Dec 06. 2019

19년 12월 6일의 나

지극히 평범했던 그날의 기억

안국역. 동덕아트갤러리. 40분 정도.

친한 동생이 졸업작품전시회를 한다고 포스터를 보냈다. 아, 벌써 졸업하는구나. 축하해, 꼭 갈게. 가서 차나 한 잔 마시자. 휴학한 지 오래다 보니 동생들이 나보다 먼저 하나 둘 졸업자가 되기 시작했다. 먼저 돈을 버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 소식을 들으면 돈을 '벌지 않고' 부모님 돈을 '쓰고 있는' 내 위치가 초조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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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 처음으로 손이 시릴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동생을 축하해주러 가는 것도 있지만 나름 전시회장이다 보니 잘 차려 입고 싶어 패딩보다는 코트를 꺼내 입었다. 이렇게 추운 줄 알았으면 목도리라도 할 걸 그랬네. 버스를 기다리며 코트 안에 향수를 뿌렸다. 어제 여자친구랑 순대곱창전골을 먹었는데, 순대국냄새가 아직까지 나는 것 같아...근데 그만큼 맛있긴 했지. 오늘같은 날씨에 딱이야. 잠시 후 버스에 타니 거짓말같이 냄새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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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느끼지만 내게 지하철은 연구실의 실험테스트 공간 같다. 

물론 실험자가 아닌 피실험자로. 제일 먼저 올라탔는데 나만 빼고 나중 온 자들이 먼저 자리에 하나 둘 앉는다. 겨우 내 앞자리에 자리가 나서 앉으려 하니 앉아계시던 옆 아주머니가 가방을 휙 올려 놓고 저기 먼 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분을 부른다. 후...눈을 질끈 감는다. 그렇다고 후다닥 빈 자리로 달려가는 건 어딘지 모르게 모양빠진다. 오늘 스타일은 전시회장에 가는 스타일. 그냥 품격있게 서서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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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부르기 되게 민망하긴 하더라. 오빠는 예술인이잖아. 내가 그린 거 보여주기 되게 민망해"


나 민망하라고 하는 이야기인가...

"내가? 나 아무것도 몰라. 그냥 보는 거지."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 특히나 미술 쪽은. 

 나를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예술쪽으로 전문가까진 아니더라도 '수준급' 지식은 지녔겠거니 생각한다. 그런 이미지인가...심지어 지식적인 것을 이야기한 적도 그리 많지 않다. 이야기하는 수준은 전시회 보기 전 읽은 팜플렛 내용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그런 이미지일까를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전시회나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내 솔직한 감상을 SNS상이든, 사석에서든 자유롭게 풀어내서가 아닐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을 보고 난 직후 받는 느낌과 전시회장을 나오면서 정리한 느낌을 잘 풀어내는 것 같다. 그 느낌이나 생각이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흠...기대에 부응해 좀 더 공부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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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그림 앞에 섰다. 

눈이 참 맑다. 흔한 초상화(?)라는 느낌보다는 담백한 맛이 있다. 한국화에 쓰이는 화법이라 한다.


"마음의 창을 영어로 하면, 'Windows to the soul'이야. 애기 눈을 중심으로 그렸어. 보통 눈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 그래서 작품명이 'Windows to the soul'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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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 인사동에 오니 커피보다는 따뜻한 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큰 거리에 나와 있는 가게들을 지나쳐 골목 안 오래된 찻집에 들어갔다. 1996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찻집이라 했다.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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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로록. 작은 주전자에 국화꽃을 우려 차를 만든다. 

 그냥 잔에 가득 나오는 것보다 뭔가...차를 마신다는 느낌이 난다. 맛은 나지 않지만 향이 은은해 참 좋다. 대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러니깐 카페에 드나드는 게 자연스러워 졌을 때, 아메리카노가 아니면 스무디를 시키곤 했다. 스무디의 강한 맛이 마치 음료를 시킨 비용을 정당화하는 듯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메리카노를 마신 후라면, 따뜻한 차를 시킨다. 뜨거우니 먼저 향을 맡고, 살짝 입을 대 맛만 본다. 괜찮으면 한 모금 마신다. 크게 한 숨을 내쉰다. 내 속에 고여 답답했던 숨이 향긋한 향으로 환기되는, 그런 느낌이다. 향을 맡고, 한 모금 마시고 크게 한 숨을 내쉬는 일련의 과정은 '여유'라는 단어로 치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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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술은 학교에 왔으니깐 한 거고, 이제는 미술보다는 다른 걸 하고 싶어졌어. 열정도 없고. 그래서 고민 중이야. 내가 미술 말고 뭘 잘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다행이다. 세상에 고민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니. 겉보기에는 행복해보이지만, 어느 순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라는 고민이 올 때 답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질문없는 답을 찾는 데 맹목적일 때가 있다. 그러니 그 답에 확신이 없으면 혼란스럽다. 정작 중요한 건 출제자의 의도. 내가 태어나 이 세상에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터무니 없이 추상적인 질문같지만 글쎄...그거 없이 살기가 오히려 더 힘들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너는 늦거나 헤맨다기보다 먼저 나아가고 있는거야. 물론 초조하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경제적으로 독립하는걸 바라볼 나이니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고민만 해선 안되고, 열심히만 하면서 고민조차 하지 않는 것도 안되겠지. 너는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주어진 것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깐, 내가 보기엔 너무 잘하고 있는데?"


또 주절주절 나혼자 이야기했다. 나 꼰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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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노을이 참 예쁘다. 

진한 주황색부터 짙은 남색까지 그라데이션 되어 있는 하늘. 어렸을 적엔 주황색 하나만으로 하늘을 칠하곤 했었지. 그게 노을인 줄 알았다. 요즘 노을을 자세히 보면서 참 다양한 색이 있었구나 라는 걸 깨닫는다. 그만큼 여러가지 생각도 들고. 

그래, 어떻게 하나의 색깔만 있겠어. 그런 색은 다른 색과 부딪힐 때 그 색을 지키기 참 힘들지 않을까. 부딪힌 색에 물들어도 보고 튕겨내기도 하면서 나만의 그라데이션 색을 찾아야겠지.

금새 해가 졌다. 입김을 후후 불며, 주머니 안의 손난로를 이리저리 주물주물 만지며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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