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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감성 Aug 29. 2020

우기에 코타키나발루 가기

중요한 건 날씨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오빠, 우리가 이렇게 여행을 올 줄이야. 진짜 너무 신기하지 않아?”

“오면 오는 거지. 왜, 같이 못 올 줄 알았어?”

공항부터 잔뜩 신이 난 나은이었다. 꼭 같이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고 일 년 내내 노래를 불렀고 거기에 못 이겨 결국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코타키나발루행. 사실, 그렇게 썩 마음에 드는 여행지는 아니었지. 흔한 관광지, 휴양지보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을 가고 싶은 이상한 심리가 있었다. 기껏 멀리 나왔는데 한국말 간판이 가득한 거리에서 여기저기 사람들에 치이는 경험은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 길을 헤매더라도 완전히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고 싶었다.

“나는 코타키나발루 오빠랑 꼭 와보고 싶었어. 여기 호텔도 너무 잘 돼있고 섬 투어 하면서 수영할 수 있는데 거기 해변이랑 바다가 너무 예쁘대. 보내 준 거 잘 읽어봤지?”



#

공항에서 나와 올려다본 코타키나발루의 하늘은 여행 유튜브에서 본 것과는 달리 우중충했다. 나은이와 겨우 맞춘 스케줄 상 지금은 코타키나발루의 우기. 날씨 자체는 너무 더워서 공항을 나서자마자 더운 습기가 가득한 찜통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택시기사들의 손을 뿌리치며 예약한 택시기사를 기다렸다.

“꼭 비올 것 같다. 이 우산으로는 안될 구름인데?”

공항을 나오며 산 작은 우산을 보여줬지만 나은이는 택시 기사가 오는 방향만 보고 있었다.

“날씨는 좋았으면 좋겠는데… 비 오면 아무것도 못하잖아.”

오랜 비행에 지친 걸까. 나은이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았다. 

“그래도 나은아, 너랑 멀리 나오니깐 너무 좋다. 비 오면 어때, 호텔 좋은데 예약했으니깐 여유 있게 놀다 가면 그것도 좋지. 안 그래?”

“으응…어? 비 온다.”


#

비 오는 날, 침대 위에 앉아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여행에서까지 그렇게 하는 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어제 여기저기 보트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섬투어를 예약했지만 오늘 비가 너무 많이 와 수영을 커녕, 보트를 띄울 수 없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우리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이따 비 그친다니깐 호텔 앞에 바다 보이는데서 저녁 먹을까?”

“그럴까? 보니깐 뷔페식이던데 맛있는 거 많을 것 같은데… 거기 가서 저녁 먹자.”

침묵. 우기라고 해도 이렇게 많이 올 줄이야.



#

“아니, 오빠. 여행 같이 온 거잖아. 나 혼자 왔어? 비 오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나은아, 여기 우기인 거 몰랐어? 내가 말했잖아, 비 올 수도 있으니깐 생각해보자고. 여기는 비 오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그리고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너가 먼저 짜증 내놓고 왜 나한테 그래?”

“오빠 기분 나쁜 게 딱 보이잖아. 그게 숨긴다고 숨겨져? 아까부터 계속 나한테 틱틱 거리잖아.”

“그건 네가 그렇게 느끼는 거고. 그래, 내가 기분 나빴다고 쳐. 나는 나름대로 내색 않고 잘해보려는 건데… 하…. 됐다, 말을 말자.”

서로 묵혀두던 것이 쏟아진 빗물에 떠오르고 말았다. 저녁 먹으러 내려가는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 한숨을 시작으로 말다툼이 이어졌다. 

“오빠는 처음부터 여기 오는 거 싫었던 거 아냐?”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여기 오자고 한 게 싫었던 거 아니냐고.”

“무슨 소리야. 비행기 티켓 끊고 환전하고 다 내가 했는데.”

“그건 어쩔 수 없이 한 거고. 아, 오빠 그쪽 아니야. 이 쪽이야.

“아, 여기 아니야? 아무튼 어쩔 수 없이 한 건 아니지, 나은아.”



#

비가 그친 뒤, 해변의 파도는 조금 높았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식사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더니 직원은 수평선까지 훤히 보이는 좋은 자리로 안내해줬다. 오… 자리 진짜 좋네. 나은이 역시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걸 보니 꽤 마음에 들었나 봐. 평소 같았으면 찍어달라고 난리였을텐데, 방금 전까지 다퉈서 그건 좀 민망한가 보다.

“나은아, 폰 줘봐.”

“아냐, 됐어.”



코타키나발루는 섬투어, 좋은 호텔, 롱비치 등으로 유명했지만 이 곳을 찾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노을이었다. 세계 3대 석양이라고 했나… 여기 계획을 세울 때 노을 영상은 수도 없이 봤지만 평소 그렇게 장관인 노을은 보기 어렵다 했고, 심지어 우기일 때는 기대하지 말고 가라는 충고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도 3대 석양이라는 노을을 기대했지만, 첫날부터 비 오는 날씨에 그런 하늘은 볼 수 없겠구나 체념하고 있었다.


먼저 나온 드링크에 비치기 시작한 붉은빛. 조금씩 구름에 스며들어 마침내 온 구름을 물들이고 하늘을 물들인 주황빛 노을. 넘칠 것 같은 파도도 잔잔해졌고 붉은 태양은 그 잔잔한 바다 위에 내려앉을 것처럼 수평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해가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앉은 테이블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파스텔톤 주황색 필터를 끼운 듯 붉어졌다.


찰칵. 찰칵.

나는 가만히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나은이의 모습을 찍었다. 처음엔 이쪽을 보지 않는 나은이의 눈에 비친 노을이 신기해서 그걸 보고 있다가 나은이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반한 모습. 평소에 텐션이 높은 나은이는 정말 정말 멋진 걸 보거나, 혹은 거기에 반할 땐 오히려 이상하게 침착해졌다. 왜 그런 걸까. 그런 나은이의 모습이 귀여워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찰칵.

나은이는 분명 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가만히 노을만 보고 있었다. 분명히 사진 찍고 있는 걸 의식했을 텐데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군. 



노을은 처음엔 하얗다가, 점차 붉은빛을 띠더니, 밤의 파랑과 섞여 보랏빛을 띠기까지 했다. 나는 나은이의 사진을 찍다가 노을도 보고, 먼저 나온 위스키(분위기 상 콜라 대신 위스키를 시켰다)도 홀짝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나은아, 여기 이렇게 앉으면 더 예쁘게 나올 거 같은데?”

나은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 듯하다가 노을이 조금씩 지자 엉덩이로 조금씩 움직여 내가 제안한 포토 스팟에 앉았다.

“오빠, 나는 아무튼 오빠한테 실망했어.”

“그래? 나은이가 그렇게 느꼈으면 너무 미안하네. 나은아 조금만 이쪽으로.”

“여기? 이렇게 봐? 아무튼, 아무튼.”

풋.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이 이미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결국 웃음이 터졌다. 

“웃어? 오빠 지금 웃는 거야?”

“미안해… 근데 지금 너무 웃겨.”



오랫동안 묵혀왔던 감정이 폭발한 줄 알았는데… 그래서 풀기 참 쉽지 않겠구나, 오래 준비한 우리 여행이 이렇게 망하는구나 싶었는데.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그런 복잡한 감정들은 행복한 기억들의 재료가 되었을 뿐, 지금 그때의 그 여행을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건 노을과 노을을 배경으로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대던 우리, 그리고 사진 속 활짝 웃고 있는 우리 둘의 모습뿐이었다.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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