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감성씨는 모두가 생업에 한창 전념하고 있을 10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는다. 올해로 27살이 된 감성씨는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게으름을 용인해주는 대학교 생활을, 지난 학기에 청산했다. 이제 감성씨는 유아 때부터 고3 까지의 억압적 학창생활에 대한 보상기간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느릿느릿 아침을 다 먹은 감성씨. 그나마 어머니 어깨 뒤로 배운 드립 커피 내리기가 귀찮아진 감성씨는 얼마 전 어머니 생일을 핑계로 커피 머신을 샀다. 입 안의 남은 음식물을 쩝쩝 다시며 캡슐로 간편하게 커피를 내리곤 2층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듯 책상 모니터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그 찰나의 시간, 커피 한 모금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본다. 아, 느지막한 아침의 여유란.
창살에 가로막힌 정오의 햇살보다 막 켜진 컴퓨터 불빛이 그의 얼굴을 더 환하게 비추면, 감성씨는 마치 바쁜 회사원이 된 듯이 인터넷 창을 열어 의미 없이 스크롤을 휙 내린다. 그는 그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정치 기사면을 보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한숨을 푹 쉬기도 한다. 세상에 대한 폭넓은 시야는 때론 감성씨를 피곤하게 만든다. 이는 그가 대학 시절, 정치외교학과의 김 00 교수에게 졸면서 배운 알량한 정치상식이 있었기에 보다 다채롭게 이루어졌다.
스크롤을 내리다 코로나 확진자 브리핑 기사 옆, ‘연예인 00, 아찔한 수영복 의상… 파격 노출’ 포토를 포착한 감성씨. ‘하여튼, 옐로-우 저널리즘이 문제야, 문제’라고 생각하며 일말의 고민 없이 마우스를 올려 클릭한다. 제목에 걸었던 기대만큼의 사진이 나오지 않자 실망한 감성씨는 재빠르게 x를 눌러 어쩌다 실수로 누른 사진임을 아주 자연스럽게 어필했다. 물론 그런 감성씨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감성씨의 눈에 모니터 아래 둔 성경이 띄었다. 잘 보이는 곳에 두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귀신같이 그의 관심적 시각에서 사라진 성경은 이상하게 ‘파격 노출’ 포토를 클릭하는 등의 행위가 끝난 뒤에야 눈에 띄었다. 2021년 새해, 감성씨에게 사회적 도덕, 윤리, 그리고 종교에 기반한 목표에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놓인 성경은 결국, 죄악에 깃털처럼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의 자괴감을 매개하는 한 권의 책이 되어버렸다.
멀뚱멀뚱 성경을 바라보던 감성씨는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하고는, 뒤늦게 오늘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날짜는 오늘로부터 1주 전인 1월 00일로 되어있었으나, 그 날의 계획과 오늘의 계획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감성씨는 대학을 이제 막 졸업한 ‘청년 지식인’이었으나, 사회의 무리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직업을 갖지 않은 상태였기에 간단히 줄여 ‘백. 수.’라고도 할 수 있겠다.
끄적끄적 계획을 수정하던 감성씨에게 얼마 전 코로나 정국을 뚫고 취직을 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감성씨는 자신과 함께 멋진 꿈을 이루자고 이야기했던 친구가 닥치는 대로 취직을 하자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뭐라 할 권리도, 자격도 없었다. 취직 준비를 하며 밤을 새웠던 친구에게, 느즈막히 일어난 오늘의 몽상가, 감성씨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기 때문이다. 받은 연락의 요지는 잘 지내냐였다. 추운 겨울날 이토록 등 따습게 지내고 있는 감성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잘 지낸다는 대답보다는 ‘그냥저냥’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영화 '몽상가들' 中
꿈의 이유를 잃은 채 이리저리 휘둘리는 감성씨는 더 이상 주변인에게 위대한 혁명가, 자유로운 몽상가보다는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는 불안한 몽유병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아무런 꿈도 갖지 않은 채 공무원이 되고자 했던 친구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는 지금 갖고 있던 자신의 꿈마저 요리조리 속이려 하는 본인의 위선적 모습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숱한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감성씨에게는 내부로부터의 혼란이 치명적이었다. 대학을 다 졸업할 때쯤이 돼서야 진로에 회의를 느낀 감성씨는 이제껏 마주하지 못한 불안과 초조에 그만 2층 방구석으로 도피하고 만 것이다. 감성씨가 내린 방문의 블라인드는 세상으로부터의 가림막이었으며 매일 아침 켜는 컴퓨터 모니터는 그의 게으름을 그나마 합리화시켜주는 수단이었다.
아, 무언가를 시작하기란 왜 이리 어려운 것인가.
반복되는 나태한 일상의 매너리즘을 끊고 어젯밤 자며 다짐했던 그 무언가를 실천하기란 왜 이리 어려운 것이란 말이냐. 어젯밤의 감성씨가 맞추어둔 알람도 오늘의 감성씨는 듣지 못했다. 어젯밤의 감성씨가 내쉰 초라한 한숨도 오늘의 견고한 감성씨를 바꾸지 못했다. 마치 감성씨가 구독하는 유튜브의 냉엄한 알고리즘 마냥 맞춰 둔 알림을 끄고,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컴퓨터를 켜고, 답답함을 느끼고, 계획을 세우고, 초조함을 느끼고, 꿈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잠에 들고를 무언가가 유도하는 그대로 무한 반복하고 있는 감성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