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도 당신의 능력

차구마 일기

by 차구마

옛날 옛적 제주도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어느 날, 호주에서 큰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날 며칠 동안 불길이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호주의 생태계를 집어삼키고 있는 거대한 화마를 촬영한 뉴스 영상을 보면서 정말 큰일이다 싶어 혀를 끌끌 찼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났다. 그 산불이 언제, 어떻게 잡혔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그건 내 일이 아니었다.

바다 건너 남의 나라는 너무 멀어서 어떤 때는 아무리 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어도 인간적인 공감이 꽤나 어렵다. 멀리 호주에서 산불이 꺼지지 않아도 나의 오늘은 제주에서 즐거웠고, 심지어 가까운 서울이 한파로 덜덜 떨었던 어느 겨울날에도 제주는 따뜻해 나의 옷차림은 밝고 가벼웠다. 타인이 마주한 곤경에 대한 잠깐의 흥미, 그리고 오랜 무관심. 그건 내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증거였다.

가끔 내게 인류애가 부족하거나 공감 능력이 심각하게 결여됐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이 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자기합리화의 회로는 재빨리 돌아갔다. 호주의 산불이 꺼지길 바라며 모두가 일상을 멈춘 채 하늘에 기우제를 지낼 수도, 빚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옆집 가장의 비극에 온 국민이 애도를 표할 수도 없는 거라고. 애석하지만 남의 이야기는 대부분 남의 선에서 끝난다. 거대한 비극이 발생하면 잠깐의 슬픔이 사회를 덮지만 ‘이 또한 지나가’ 버린다. (대체로 이런 종류의 슬픔은 더욱 빨리 지나간다.) 남의 굴곡진 이야기에도 우리 삶은 전과 같이 움직인다. 우리는 관망의 존재이자 관성의 존재다. 너의 슬픔을 공감하는 일에 과한 에너지를 쏟지 않고, 너를 구출하는 일에 결코 내 몸을 던지지 않는. 그런 삶의 태도가 나의 생존을 우선 확보하는 거다. 그런 전략이 오래 굳어지면 언젠가 내 생존을 위협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만 모른다.


어쩌면 적당히 안타까운 선에서 감정을 멈추는 태도가 보편적 인류애의 모습일 테다. 우리는 인류애가 이런 모호한 층위에서 고정된 이유를 애써 찾아볼 수도 있겠다. 나의 이기심이 미덕이 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아래 학습된 경제적 태도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쓰도록 작동하는 뇌과학적 분석에서, 먹고살기 너무 팍팍해 남을 돌볼 여유가 없는 환경이라는 사회과학적 시선에서.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론 들일 테지만 그래도 가장 슬프고도 본질에 가까운 답변은 문학적 관점이 아닐까. 문학은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대체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너랑 나는 충분히 평범해서 그렇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 <목화맨션>에서 낡은 연립주택의 임대인인 만옥은 가난한 세입자 순임과 평범한 인간관계를 맺는다. 이삿날 함께 땀 흘려 짐을 옮기고 “냉면”을 먹으며 말을 텄던 두 사람은 직접 쑨 “묵”과 “수박”까지 나눠 먹는 언니-동생 사이가 되지만, 각자의 난처한 상황이 극에 달하자 임대인과 임차인인 그들의 간극은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들은 결국 “미지근한 묵”처럼 뜨뜻미지근한 이별을 하게 된다. 서로 형편을 잘 알기에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 그 이상을 해줄 수도 없기에 각자의 처지에 순응해버린 것. 애초에 만옥과 순임 사이 거리는 사람 사이(人-間)의 기본값이자, 나-타자 사이의 디폴트 값이다. 이 간극은 꽤 넓어서 좀처럼 좁히기 어렵고, 그래서 그녀들이 받아들이는 결말은 눈물 없이 덤덤(평범)하다.

철학자 故김진영 선생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칠레의 밤』에 주석을 달면서 고대국가의 인신공양과 같은 ‘희생제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가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강박적 불안 때문에 미래를 지향하기보다는 현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 제도”라고.(『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일기』, 메멘토, 2019) 그는 제의에 의해 희생된 이들이 주로 낮은 계층에 속했다는 사실을 우선 지적하지만, 좀 더 아픈 질문을 허락한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현 상태 유지’에 급급한 평범한 우리도 그들의 ‘희생제의’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고, 혹은 나의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겉으로 울며 속으로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하자. 우린 이름 모를 타인의 고통에 대체로 무심하고, 얼굴 아는 당신의 슬픔에 대체로 무지하다. 타인의 소식에 당장 팔 걷고 달려가는 이들의 특수성을 조명하는 게 언론의 영역이라면, 타인의 상황을 애써 회피하는 보편성을 불편하게 꼬집는 게 문학의 영역이자 윤리의 영역이다. 우리는 대부분 언론의 영역을 조망하며 문학의 영역에서 산다.


그래도 다행인 사실은 인류애에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것. 죽어가는 인류애의 희망은 돌연변이와 사피엔스종의 학습 능력에 달려있다. 언제나 타인의 고통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타인의 고통 그 최전선으로 스스로 달려가는 이들. 보편성의 유혹을 뿌리치고 진화한 돌연변이 같은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봉사자, 기부자, 희생자, 의인과 위인 등.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아마도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쓰라린 관심’일 테다. 우리는 스스로 진화할 수 없을 테지만, 돌연변이들로부터 봉사, 후원, 성금 등 자신의 일상을 조금 나눠 위로를 건네는 법을 넉넉히 배울 수는 있다. 우리가 흔히 오지랖이라고 말하는 것들. 그게 보편적 인류애를 무너뜨릴 특수한 희망이고 인류만이 지닌 유일무이한 능력이다. 몸과 마음에 벤 사소한 오지랖의 답습이 우리가 어렵게 말하는 윤리며 도덕이며 철학의 쉬운 얼굴이고, 가장 거룩한 사랑일 테다.


괜찮다면 우리에게 크나큰 노력을 요구하는 인류의 희망 목록들을 적어 본다.

하나, 필요한 일엔 관심 팽창하기.

하나, 떨어야 할 오지랖은 한 번쯤 최선을 다해서 떨어보기.

하나, 우리를 넓히기.


요즈음 바다 건너 아프간의 이야기가 어지럽다. 내가 무사한 만큼만 그들의 무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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