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따놓은 어설픈 점수는 휴지조각이 돼버리고, 나는 취업한 친구의 토익 자료를 얻으러 간다. 종이봉투가 찢어질 듯 가득 담긴 친구의 지난 1년이 무겁다. 문제집은 끝이 해어져 너덜거리고, 빼곡한 필기는 손때 묻어 흐릿하게 번져 있다. 치열하고 간절했을 녀석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기어이 목적지에 발을 디딘 장한 친구의 뒷모습에서 같은 바다를 뒤늦게 항해할 풍랑 속 나를 찾는다.
이제 막 발을 담근 바다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깜깜하다. 내 몸 모든 곳에서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시야 너머 저 너른 바다 위에 잔잔한 바람과 반짝이는 햇볕이 기다리고 있을지,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손때 묻은 친구의 낡은 지도를 받아들고 이제야 저 검은 바다로 나아간다.
가슴이 원치 않는 일을 시작하는 밤이 깊어간다. 남의 나라 철자 앞에 겸허히 앉아 목표 점수를 정하고 받드는 모습이 처연하다. 미래의 나를 고민하고, 상상하며, 남과 다른 길을 가려한 ‘철없던’ 나를, 지금 다시 생각한다. 헛된 상상을 하던 그때의 나에겐지, 현실과 타협한 지금의 나에겐지 모를 한없는 부끄러움이 두려움처럼 몰려온다.
남들과 다르게 살겠다고 다짐한 맹세가 깨지던 밤이 깊어간다. 백년 전 어느 날,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돼야만 했던 어느 청년의 밤이 그랬듯, 나는 나의 주권을 잃은 채 방 안을 표류한다. 사회가 만들어낸 정해진 길에 굴복하지 않으려던 마음이 단지 헛된 이상으로 치부되는 치욕의 밤에, 나는 쓴다. ‘보습 대일 땅’을 되찾을 날을 간절히 기다리면서도 결국 ‘김 아무개’를 ‘나까무라’로 써야만 했던 그 밤을 나는 오늘에야 지새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