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편] 나의 가난

짧디짧은 이야기

by 차구마

나는 가난 속에서 자랐으나 빈곤을 알 길이 없었다.


경상도 작은 산맥에 자리한 야트막한 선산은 웅장했다. 산자락을 타고 굵고 곧게 뻗은 금강송은 가문의 뼈대를 땅 밖으로 드러냈다. 임금의 좌우 옆 자리를 지키던 충신들, 그 백골이 진토 되어 땅을 먹였고 산은 나무를 먹여 다시 산을 이뤄나갔다. 선산의 위세는 가문의 영광만큼 울창했다. 조부는 나라의 첫 대통령을 옆에서 모셨고, 선친은 지역에서 네 번 배지를 다셨다. 그러나 결코 넘치도록 재물을 탐내지 않았고, 청렴결백하게 살아 명망을 이었다. 선산은 여름엔 푸르게, 겨울엔 하얗게 변했으나 그 뿌리는 단단했다.


가문의 뼈대를 이어받은 나의 발목은 굵었다. 어린 시절부터 허리를 숙이는 일보다 허리를 숙이는 남의 모습이 익숙했다. 그 접힌 허리엔 억지가 아닌 존경이 담긴 것을 어린 나도 알 수 있었다. 권력은 단절 없이 내게로 흘러왔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가문의 힘으로 지역에 자리 잡았다. 나는 젊을 때 당선됐다. 가문의 힘으로 첫 번째 배지를 달았고, 그 후엔 나와 내가 몸담은 당의 힘으로 내리 두 번 다시 달았다. 나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청렴했다. 임기 중엔 다음 선거를 위한 재산만을 축적해두었을 뿐이었다. 정치인의 명예로운 가난이었다. 선산엔 죽어서 돌아갈 내 자리가 마련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엔 정세가 이상했다. 정치는 요동쳤다. 나라님이 바뀌며 나의 당은 무너지고 있었다. 나의 힘은 가문과 당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내가 곧 가문이었고, 가문의 뼈대는 흔들렸다. 나는 살아야 했다. 내가 살아야 가문이 살고, 당이 살고, 다시 내가 살 수 있었다. 다른 정치인보다 가난했으나 그것을 명예로 삼아왔던 지난날이 아득히 흔들렸다. 가난했기에 낙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빈곤을 겪어보지 못한 자의 두려움은 강렬하게 나를 덮쳐왔다.


두려움은 나의 가난을 도둑질해갔다. 나는 당장 오래 알고 지낸 지역의 유지, 기업인들을 만났다. 검은 돈을 품에 싸 들고 온 그들을 처음으로 나의 집에 들였다. 그들이 즈려밟은 가문의 마루는 삐걱거렸다. 나는 그들에게 이권을 약속하고 돈을 받았다. 권력 앞에서 돈은 쉽게 움직이는 생물이었다. 돈은 비어가는 가문의 곳간을 채웠고, 이곳저곳에 소금처럼 뿌려지며 나의 가난을 몰아냈다. 나의 가난은 청렴에서 나온 가난이었고, 올곧음에서 나온 가난이었고, 명예에서 나온 가난이었다. 나는 가난을 도둑맞음으로서 진정한 가난을 불러들였다.


나는 가문과 당과 돈의 힘으로 네 번째 배지를 달았다. 이제 막 콧수염이 거뭇하게 난 내 새끼들의 손목은 얇고 가냘팠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었다. 나의 뿌리는 여전히 탄탄했고, 가문은 굳건했으며, 선산의 내 자리는 터가 넓었다. 4월의 푸른 선산 앞에서 가슴팍의 배지가 탁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우-웅하며 산이 울었다. 나는 우짖는 고향땅을 뒤로하고 서둘러 여의도로 향했다. 그곳에 나의 새로운 가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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